아이패드 프로 11인치(2세대, 프로로는 4세대) 간단 리뷰

많은 리뷰들이 있어 내 관심사로만 이야기하자면 usb-c에 대한 것. 라이다니 A12Z니, 매직키보드니 이런 건 관심 없다. 어찌 보면 usb-c에 대한 리뷰는 3세대 때 이미 나왔을 이야기였겠지만 나는 이제 쓰게 됐으니.

 

애플 iOS의 폐쇄적 환경이야 두 말 할 필요도 없지만 여태껏 그런 환경에서도 돌파구를 찾아보고자 이 장비 저 장비 기웃거려봤으나 마땅한 해결책은 없었다. 외부로부터의 자료 입력은 클라우드 또는 무선환경을 통해서나 그나마 가능했는데 미리 클라우드에 올려놓고 있다면 의외로 간단하지만 정작 현장에서 바로 자료를 넘겨받아 작업하려고 하면 여의치 않은 경우가 많다. 특히 용량이 큰 경우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런 점에서 usb-c를 통한 확장성 확보는 정말 신의 한 수다 싶다. 여태껏 애플만의 전용 규격만을 이용하다 보니 포기한 게 한 두 개가 아닌데 말이다.

예를 들어 usb-c 허브를 통해 pd전원과 hdmi, ext hdd or sdd 를 연결하는데 전혀 무리가 없다. 덤으로 블루투스로 키보드와 마우스, 그리고 무선 헤드폰까지 한 큐에 모든 게 해결된다. 그냥 된다. 사무실에 맥북을 위해 설치한 환경을 아이패드가 그냥 쓸 수 있다. 맥에 연결하던 usb-c 케이블을 그냥 아이패드에 꼽으면 된다. 맥용 전원 + hdmi + 외장하드 + usb speaker가 그냥 된다.

 

잡스는 아이패드를 포스트 PC의 자리에 놓기를 원했다. 그리고 애플의 요리사(Cook)는 멀고 먼 길을 돌아 거의 십여년 만에 그런 위치 언저리에 아이패드를 끌고 온 것 같다. 과연 잡스라면 진작에 usb-c를 채택하지 않았을까도 싶다. 아이맥에서 usb를 과감히 도입했던 것처럼 말이다. 마진의 쿡이 라이트닝 포트에 대한 집착 또는 재고떨이를 위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한참 걸렸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제서야 외부환경과 하드웨어의 소통이 원활해지기는 했지만 소프트웨어가 페이스를 같이 못하고 있다. 좀 처지는 느낌이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녹음한 멀티트랙 음원을 개러지밴드에서 작업하려고 하면 맥에서는 멀티트랙 음원들이(16채널) 포함된 폴더를 통째로 던져주면(drag&drop) 되는데 iOS 개러지밴드에서는 채널 하나하나를 일일이 넘겨줘야 한다. 터치 환경에 최적화되지 않아 불편한 점인데 점점 개선되지 않겠나 싶다. 다시 말 하지만 여기까지 해 준 것만 해도 어딘가! ㅎㅎ 

(파일 하나 하나 선택해서 하나하나 트랙에 던져줘야 한다.)

 

참고로 개러지밴드에서 음원 import 하는 방법

1. 개러지밴드에서 내 파일 만들고

2. 오디오입력으로 트랙 만들고

3. 마디 설정을 자동으로 놓고

4. loop - 파일 - 파일 앱에서 찾기로 원하는 음원 선택

5. 리스트에서 불러온 음원을 끌어다 트랙으로 던져 넣기

6. 이 과정을 트랙별로 해야 한다. 

 

많은 리뷰에서 아이패드의 포지션에 대해 ‘아직... ‘어쩌고 하는데 개인적 견해로선 이미 지나서 딴 데로 가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부족한 점이 있긴 하지만?', 그건 기존 pc환경에 익숙해서 느끼는 거다. 그냥 아이패드의 환경 안에서 바라보면 아이패드 1세대(2010)부터 써왔던 진성 애플빠로서는 초창기 버전과 지금의 아이패드는 마차에서 바로 전기차로 넘어가는 엄청난 차이를 보여준다. 만약 70~80년대 IBM이 아닌 애플이 주류였다면 아이패드의 시대는 훨씬 빨리 왔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러다 보니 맥과 아이패드의 위치가 애매해졌다. 처음에는 세 들어왔던 처지에서 이제는 집주인 행세를 하려 들지도 모른다는. 

p.742(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

"오늘날에도 신의 유일성을 왜곡해서 이교도에 대한 배척과 분쟁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그때 역시 신앙을 자신들의 세속적 탐욕에 이용하는 불순한 세력(성직자, 정치가 ,상인)이 선동해서 저지른 반그리스도적이고 반신앙적인 만행이었지요. 우리는 여기서 “최선의 것의 부패는 최악이다(Corruptio optimi pessima)”라는 오랜 격언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십자군을 일으키며 “신의 뜻이시다(Deus Le Volt)”라는 구호로 민중을 선동했던 중세 성직자들이 그랬듯이, 신을 왜곡하여 빌미로 삼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가장 쉬운 선동 방법이지만 가장 나쁜 방법이기도 하지요."

중세에만 존재하는 십자군이 아니다.
현 시대에도 존재했던 아니 지금도 존재하는 십알단이 있고 신천지가 있다.

성직자 -교회 총회, 전광훈 같은..
정치가 - 음... 요즘 핑ㅋ당?
상인 - 순실전자

이런 커넥션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 퍼져 있을테다.

https://m.clien.net/service/board/lecture/14707167?od=T31&po=0&category=&groupCd=allreview

매번 클리앙의 글만 퍼오기는 하지만 이 시대를 사는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생각해봐야 할 주제라고 여기는지라.

핵심은 종교는 현세대의 기준으로는 비합리적인게 맞고 그걸 인정할 수 있어야하는데 많은 교인들은 비합리적(사실의 문제)=BAD(선악의문제) 이런 범주의 오류에 빠져 있다는 것. 그래서 이걸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

어릴 때 교회를 통해 회개와 구원에 대한 믿음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칼 세이건의 'COSMOS'를 다섯번 이상 탐독하면서 신앙과 과학에 대한 견해를 나름 가지고 있었던 터라 종종 교회 안에서 창조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그냥 듣고 있자면 논쟁거리로 갈 것 같아 그냥 입다물고 있는 경우도 있고 어떨 때는 이단아처럼 대해질 때도 있지만 어쩌겠나?

생각이란게, 내 믿음이란 게 뇌 속의 사고과정, 그것도 양자수준의 세계에서 임의로 결정되다보니(될 것이라고 요즘의 뇌과학에서는 설명하는 것 같다) 어린 그 시절 머릿속의 어떤 결정으로 인해 여지껏 이르렀는데 그걸 어떻게 바꾸나? 이걸 설명하고자 하면 꽤나 긴 글이나 시간이 필요할테니 생략하고.

아무튼 그나마 나름대로는 신의 존재에 대해 의심이 없는 것 하나로 여지껏 버티고 있는 것이다만 요즘의 교회 꼬락서니 보고 있자면 회의도 많이 들지만 바울사도를 통한 성경 말씀에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지. 희망이 있고 건전한 교회도 많다.



Bowers & Wilkins PX에서 PX7으로 넘어와 며칠째 쓴 소감.

숫자와 사이즈만 변한게 아니라 소리를 다루는 게 B&W 원래 능력을 비로소 보여준다는 느낌.

전작에서는 노캔 On Off의 성향이 너무 달랐는데 이제는 큰 변화없이 자연스럽게 들려준다. 마치 애플 에어팟프로의 그 기능처럼. 물론 헤드폰과 이어폰을 같은 범주에 넣고 비교할 수는 없지만.

자회사 800 시리즈 스피커의 소리를 기준으로 설계했다는데 그런 초고가 스피커는 직접 들어본 적이 없어 모르지만 적어도 로이코 전시장 가서 직접 그런류 스피커 소리를 들어본 바로는 이 헤드폰은 B&W가 헤드폰에 손 댄 이후로 지금에 와서는 제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싶다.

블루투스, 무선 헤드폰으로 이정도 소리를 들려준다는 건 너무 고마운 것. ㅎㅎ 게다가 노이즈캔슬링을 켰는데도 말이다.

덧붙여 착용감도 전작 PX는 착용하고 20~30분 정도 지나면서부터 정수리를 압박하는데 이번에는 매우 편안하다.

아무튼 소리와 외관 디자인 두개 모두 매우 신경쓰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PX를 의아하게도 조기에 단종시킨 것 같고.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전작의 노캔 시 소리가 껐을 때와 너무 다른 점은 사용 내내 제작사의 능력을 의심케 했으니까.

마지막으로 케이블을 연결하면서 노캔을 쓸 수 있는데 생각지도 못한 장점을 얻게 됐다. 사실 PX때부터이긴 하지만 베이스 실연주 시, 특히 합주 시에 모니터용으로 최고다. 외부 소음이나 배음이 섞이지 않아 타악기와 내 악기가 매우 선명히 귀에 들어온다. 예전에 대학로 이어폰샵 가서 이에 대해 이야기해봤더니 딴 세상 이야기처럼 대하기는 하더라만. 일단 써보면 다른 모니터 헤드폰 못쓰게하는 단점도 ㅎㅎ

그나저나 예배가 다시 열려야 연주 때 테스트 해 볼텐데. 언제쯤이 될까? 😢 @ 노원 우리집


사소한 정의 - 10점
앤 레키 지음, 신해경 옮김/아작



이 책을 알게된 것은 #페미니즘 이 반영된 SF 소설이라는 주간지 서평을 통해서다. 요즘 우리 사회의 화두 중 하나인 페미니즘이다 보니 SF와 결합한 페미는 어떤 느낌인가 싶어 골라봤다. 그래서 이 책의 모든 등장인물은 He가 아닌 She, 그녀들이다. 심지어 인공지능과 같은 가상인격도.


물론 그들, 또는 He 들도 있기는 한 것 같지만 여하튼 POV는 그녀들의 시선을 통해서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녀의 불평등에서 비롯한 문제를 부각 시키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관점만 바뀐 거다. 이게 처음엔 꽤 어색하긴 하다. 대체 언제쯤 '그'가 나오나 기다려질 정도 였다. 물론 그런 일은 없다.


앞서 페미니즘을 이야기했고 그런 평이 있지만 정작 소설의 주제는 그와는 관련이 거의 없는 듯 하다. 배경설명이 전무해서 그런 지도 모르겠다-예를 들어 왜 여성성(性)이 주된 성(sex)이 됐는가 등에 대한 것들 말이다.
여하튼 보는 이마다 각각 이겠지만 '나'라는 것을 정의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이런 주제는 사실 많은 SF작품을 통해 제기된 흔한 이야기이도 하다. 그렇지만 이 책처럼 수량적으로 시간적으로 스케일을 크게 잡은 경우는 흔하지 않다. 
그리고 ‘#사소한_정의’, 원제는 ‘Ancillary Justice’인 정의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사소한’이라는 단어와 ‘부가적’이라는 뜻을 포함하는 ancillary라는 단어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아무튼 소설 속에서 더불어 순간순간의 상황 속 사소한 듯한 정의에 대한 결정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떤 결과를 만들 지, 그것이 과연 거대한(?) 정의(Justice)를 이루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 가를 이야기한다. 카오스 이론의 영향을 따른 듯 한데 이 또한 흔한 소재이긴 하다. 
그런데 이 두 소재를 그녀의 관점으로 부드러우면서도 가볍지 않게 잘 버무려놨다.


이전에 존 스칼지의 ’노인의 전쟁’이라는 책과 그 시리즈를 읽었다. 역시 스페이스 오페라로 구분되는 유사한 장르의 책이다. 거기서도 작가 앤 레키와 같이 복제인간을 통해 ‘나’를 정의하는 것이 미래세계에서는 지금과는 현저히 달라질 것을 예고하고 있다. 다만 페미니즘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스컬지와 레키의 작품의 차이점이 나타나는데 노인의 ‘전쟁’이라는 제목처럼 유혈이 낭자한 묘사가 많고 전투장면들이 박진감 있게 묘사된다면 ‘사소한 정의’는 그 보다는 훨씬 차분하고 정적인 편이다. 그래서 1백여 페이지가 넘어가기 까지는 매우 지루한 감도 있어서 읽는데 매우 주의를 요한다. 물론 후반부 클라이막스에 이르러서는 호흡이 가빠지게 하는 장면들이 등장하지만 역시나 매우 절제된 듯한 느낌이다.


간만에 좋은 작품을 만났다. 주제도 좋고 우주를 배경으로 해서 스케일도 만족스러운 책이다. 시리즈라는데 다음 작품도 봐야겠음.


바람의 그림자 1

바람의 그림자 1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저/정동섭

1945년 여름, 스페인 내전 직후의 바르셀로나에 다니엘이란 이름을 가진 어린 소년이 아빠의 손에 이끌려 미명에서 깨어나는 도시의 거리를 걷고 있다. 어릴 적 엄마를 잃은 아들을 위로하기 위해 아빠는 '잊혀진 책들의 묘지'로 데려간다. 이곳의 기본 수칙은 첫 방문 시 자신만의 책 한 권을 얻을 수 있는 대신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누설할 수 없다는 점! 다니엘이 우연찮게 고른 책은 훌리안 카락스라는 자가 쓴 『바람의 그림자』이다. 후에 놀랍게도 다니엘은 훌리안의 모든 작품들을 불살라버리고 그의 흔적을 지워버리려는 검은 사내와 맞닥...





바람의 그림자 중.
La Sombra del Viento
- Carlos Ruiz Zafon


p.390
독서라는 예술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고.
그것은 내밀한 의식이라고.
책은 우리가 이미 우리 안에 지니고 있는 것만을 보여주는 거울이라고.
독서할 때 우리는 정신과 영혼을 건다고.
위대한 독서가들은 날마다 더 드물어져가고 있다고.

p.401
머리와 가슴과 영혼이 있는 남자
자식의 말을 경청할 줄 알고, 자식을 이끌어주면서도 동시에 존중할 줄 아는 남자
하지만 자기 결점을 자식한테서 보상받으려 하지 않는 남자
자식이 그저 아버지라서 좋아해 주는 남자 말고 인간 됨됨이 때문에 존경하는 남자, 아이가 닮고 싶어하는 남자

바르셀로나
- 다니엘과 아버지의 서점 : 사나 아나 가(街)
- 클라라 : 레알 광장
- 오랜시간의 흐름에도 품위를 유지하는 : 아테네오
- 고독한 포르투니의 : 론다 데 산 안토니오
- 카탈루냐 광장
- 누리아의 집이 있는 : 산 펠리페 네리 광장
- 티비다보 애비뉴 : 32번가 근처와 전차와 석양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를 보고 있자면 언젠가 저곳에 꼭 가보고 싶다는 동경이 든다. 백색의 설원과 그 황량함을 느껴보고 싶기 때문에.
이번에 읽은 카를로스 루이스 샤폰의 ‘바람의 그림자’를 읽는 내내 바르셀로나의 그곳들에 대한 그리움이 솟아난다. 가보기는 커녕 영상으로만 접해본 곳인데도 읽는 내내 그곳을 거닐고 있다는 착각이 든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의 읽는다는 의미와는 달리 독자의 머리 속에서 각종 허구와 상상을 조합해 읽는 이만의 세계가 만들어지게 한다. 그래서 동일한 줄거리를 가짐에도 읽은 이에게 투영되는 세상은 모두 다른 색과 구조, 모양을 가지게 될 거다. 바르셀로나의 실재하는 지명과 거리는 등장인물들을 중심으로 읽은 이의 마음속에서 길위의 다양한 사람들과 움직이는 것들, 하늘, 바다, 소리들로 채워진다.
바르셀로나는 그러한 모든 것들이 채워지기 전의 하얀색의 도화지 같은 것. 그 어는 것도 그려지기 전의 날 것 그대로의 바르셀로나를 접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언젠가 가 볼 일이 있을 것으로 여기며.

등장인물 정리




힐빌리의 노래

힐빌리의 노래

J. D. 밴스 저/김보람

아마존닷컴 종합 1위, 「뉴욕타임스」 논픽션 1위, 빌 게이츠와 소설가 김훈이 추천한 화제의 책
빈곤과 무너져가는 가족, 그 어둠 속에서 일어선 한 청년의 진솔한 성장기

‘힐빌리’는 미국의 쇠락한 공업 지대인 러스트벨트 지역에 사는 가난하고 소외된 백인 하층민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저자 J. D. 밴스는 힐빌리 출신의 32살 청년으로, 약물 중독에 빠진 어머니와 수없이 바뀌는 아버지 후보자들, 그리고 다혈질에 괴팍한 성미를 가졌지만 손자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조부모 밑에서 자라며 윤리와 문화의 붕괴, 가족...



이 책을 읽은 내내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Winter’s Bone’과 ‘길버트 그레이프(What's Eating Gilbert Grape)’. 거친 숲, 눈, 바람, 황량함, 쓸쓸함, 고독함, 무력감. 그 속에서 피어 오르려는 작은 희망도 있긴 하다.

물리적 환경도 그럴 수 있겠지만, 삶을 둘러싼 환경이 그러한 곳이 저자의 고향이다. 그리고 그곳에 사는 이들을 ‘힐빌리’(관련이미지)라고 부른다. 우리로 치면 OO촌뜨기 정도?

지은이는 자신의 성공을 자기 지역의 사람들과는 달리 그의 앞에 열려진 길과 환경이 너무도 운이 좋았다라고 말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이 있지만, 그런 노력을 해도 안되는 이들이 수두룩 함에도 저자 J.D.밴스는 정말 하늘이 도운 케이스일 듯 하다. 엉망인 상태의 어머니 밑에서 아버지라고 불리울 만한 사람만해도 여러명인 상황.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부모의 도움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할모, 할보로 칭해지는 조부모들 덕에 침몰하지 않고 간신히 버텨간다.

힐빌리가 그렇게 좋은 뜻은 아니더라도 지역 자체의 분위기는 대가족 중심의 공동체를 근간으로 한다. 그래서 그것이 밴스에게 운으로 작용한 것인지도. 조부모의 지속적이고 강인한 도움이 그나마 그를 고등학교까지 이끈 듯 하다. 그럼에도 이후의 과정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어찌하여 해병대를 거쳐 자신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터득하는 것도 그렇고 오하이오 주립대까지 가는 과정, 예일대 로스쿨까지의 여정은 중류층 이상의 가정환경과 사회적자본(인맥이라고 책에서 본다)을 가진 이들에게는 어느 정도의 노력만으로도 충분히 달성할 수 있는 일일런지도 모르지만 힐빌리 출신에게는 그런 삶과 방식이 존재하는 지조차도 알 수 없다.

미국이라는 사회는 늘 ‘아메리칸 드림’으로 외부에 포장되어 있고, 한국에 사는 나같은 사람들은 기회의 땅, 성공의 가능성이 널려있는 땅에 사는 저 USA들은 정말 좋겠다라는 막연한 부러움 속에 살아간다. ‘미국 거지도 영어를 잘하더라’라는 자조섞인 영어부심도 그렇고.

그런데 정작 그 미국 땅에 살아가는 상당수의 미국인, 그것도 주류로 여겨져 왔던 백인 사회 안에는 여지껏 외부세계에 잘 알려지지 않은 계층이 존재한다. 물론 20세기 후반부터 미국사회에서도 그 문제가 점점 부각되면서 알려지기는 했어도 이 책에서 보여주는 것만큼인지는 몰랐다.

기회의 땅이리라 여겼지만 그 기회조차 존재하는 모르는 채로 살아가는 많은 힐빌리들. 기회와 그 기회를 잡는 방법을 모르니 자기 자신이 포기한 줄도 모르고 그냥 살아간다. 포기는 그 목표를 알기라도 한다지만 그 목표가 존재하는 지도 어떻게 잡는 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게 지금 미국의 하위 백인 노동자계급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시민의 계급이 없고 평등한 위치에서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경쟁을 하는 것이라고 여겨져 왔다. 계급이 아예 없을 수는 없겠지만 이 정도까지 이리라고 생각해보지는 못했다. 특히 미국이라는 사회에서.

실례로 지은이가 나온 오하이오 주립대는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상당한 금액의 장학제도가 있다. 당연히 그런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안다면 기회로 삼을 수 있을 텐데도 그 혜택을 전혀 이용 못하고 있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부모의 무관심, 주변 사회의 무지함. 개인의 나약함 등이 부정적 시너지를 낸 결과다.

미국 교육체계가 문제 많다며 오바마를 비롯한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교육시스템을 개혁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럼에도 문제의 해결이 더딘 것은 정작 시스템에만 있는 문제만이 아니라 교육의 대상인 사람과 그 사람들의 모임인 공동체에 큰 문제가 있다.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낸 지지층이 바로 이 힐빌리와 같은 백인 노동자 계층이다. 문제의 원인을 외부의 탓으로만 돌리며 그 해결을 트럼프에게 맡기면 해결되리라는 극히 수동적이면서 외부세계에 적대적인 그들이다. 정작 문제해결의 근원은 자기 자신들임을 모른는 것인지, 아니면 알고도 극도로 외면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사회도 점점 저렇게 되어 가는 듯 하다. 양극화라는 말이 십수년 전에 어느 대통령님을 통해 알려지면서 그 단어는 자신의 존재감을 더 굳혀간다. 금수저, 흙수저, 88만원세대와 같이 나이와 지역, 출신에 따른 계층의 분리와 격차는 점점 일반화되고 깊어져 간다.

두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의 입장에서 이 책을 보는 내내 내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나는 얼마나 단호하고 강한 책임감으로 아이들을 키워가고 있는가? 제대로 된 정보와 지식으로 아이들을 케어하고 독려하고 서포트하는가? 그리고 동시에 과연 나의 가정은 화목한가? 아이들이 안심하고 그 둥지에서 마음 놓고 자신들의 꿈을 키워가게 하는 가 등등. 정말 자신없는 질문들이다.

저자는 정말 운이 좋았던 것은 틀림없다. 친척 중에 단 한명의 전문대 이상 졸업자도 없는 상황에서 예일대 로스쿨을 나와 유명 법조인이 된다는 게 글로 보고 말로만 들어서 그렇지 사막 한 가운데 떨어져서 길을 찾아가는 것과 다름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 중에 ‘에이미 추아’ 교수가 등장한다. 그 이름을 보는 순간 예전에 읽었던 ‘제국의 미래’의 저자임과 동시에 ‘타이거맘’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 중국계 교수다. 맹렬한 자녀 교육의 대명사. 그 교육방식에 대한 찬반논란은 여전하지만 정작 저자를 대하는 에이미 교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스승의 모습이다. 타이거맘이라는 표현이 분명 과하고 실제로도 그랬던 모양이지만 자식을 세상에 내보내기 전까지 그 아이가 세상에 적응하게 하려는 부모의 노력은 분명히 있어야한다.

힐빌리로 불려지는 애팔래치아 - 미북동부 지역 백인하위층의 이야기는 우리와 비교할 때 같지는 않고 그대로 불러다 쓸 수는 없지만 그것이 주는 느낌은 상당히 공감할 수 있다. 책을 보다보면 성공담에 대한 이야기인가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그 성공이 정말 어려운 것이고, 저자와 같은 상황에서라면 성공이란게 있는 것인지도 모르는, 그 절망적인 시절을 살아가는 이들에 대해 글쓴이는 세상에 알리고 변화를 요구하는 내용이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요즘 애들은 끈기가 없어’라며 개인의 낙오를 꾸짖는 주변의 꼰대들의 충고(이에 대해선 할 말이 많지만 관련 기사로 대신한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운이 더 중요한 이유' http://ppss.kr/archives/78599)가 아닌 그 문제의 원인이 개인과 가족, 공동체 모두에게 똑같이 있으니 함께 관심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고 하는 듯 하다. 여기에 정부와 같은 시스템의 개입이 더해지면서 효과가 나리라 보는 것이다.




“팀 쿡, 매주 맛있는 커피 몇 잔 값이면 iPhone X(텐)을 분할 플랜으로 구입할 수 있어”

https://www.macrumors.com/2017/11/03/iphone-x-coffee-price-comparison/

며칠 전 이런 기사가 떴었다. ‘오~’ 하면서 ‘그렇지’라고 동의 하셨을 분도 있었을테고, 반대로 쓴웃음을 보낸 이도 있었을테다. 나도 ‘허허’ 하고 웃고 지났는데 문득 그 말이 오늘 아침 떠올려져 되짚어보니 음흉한 흉계가 깔려있는 말이다.

사과농장이라고 들어본 분 많을테다. 설마 저 사과가 먹는 사과라 여기는 분은 없으시길. 나의 경우도 아이팟(ipod)으로 시작된 사과농장이 현재에 이르렀다.

 

이젠 커피 몇 잔 값으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비슷한 경우를 가진 분 많을 듯 하다. 그럼에도 저렇듯 태연하게 커피향 풍기 듯 여유롭게 말하다니 쿡의 음모는 매우 음흉하기 짝이 없다.



재스퍼리들리의 [티토:위대한 지도자의 초상] 읽음. 5.0




티토

티토

유경찬

불과 20여년 전만 해도 옛 유고슬라비아는 동구권에서 안정되고 잘살던 나라로 평화와 번영을 누리던 나라였고, 당시 그 핵심에는 '티토'라는 인물이 존재하고 있다. 강력한 의지와 카리스마를 지닌 위대한 지도자로 남아 있는 티토 대통령에 대한 생생한 다큐멘터리로서의 이 책은 티토의 어린시절에서부터 생을 마감하기까지의 행적을 추적하고 있다.전세계인의 기억에 깊이 남아있는 티토의 독보적인 업적을 소개하고, 이를 통해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유고슬라비아를 한 나라로 묶었으며, 동서양이라는 굴레를 앞세운 강대국들의...


책을 읽는 동안 작년에 다녀온 유고연방의 여러 지역들이 떠올려졌다. 지형이며 도시들이 속의 내용과 오버랩되면서 이해하는 상당한 도움이 됐다예전 중고등학교 시절 3세계의 리더라고만 배운 피상적인 인물이 피부에 와닿듯이 실제적으로 느껴지게 준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지역의 인물에 대해 나온 책이 얼마나 되겠나 싶다. 강대국도 아닌 그나마 유고연방으로 존재했을 때와는 달리 원래의 소국들로 나뉘어져 버린 지금에선 더더욱.


티토라는 인물에 대해 마디로 해보라면공산주의자 , 아닌 듯한 매력적인 인물이다. 어떻게 보면 진정한 공산주의를 바라고 추구했었던 사람인 같으면서도 되려 그렇지 못해 어정쩡한 스탠스를 취한 그러면서도 시대의 운을 타고나 천수를 누린 천운을 가진 사나이라고 할까?


그의 사후 유고는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 코소보, 세르비아, 보스니아에서 벌어진 인종청소 등으로 인해 인간의 잔학성을 보여주는 동네가 되어 버렸다. 그렇지만 참상을 겪은 후에 도리어 티토는 그가 티토였는지를 다시금 알게 해주면서 지금은 생전만큼은 아니어도 그에 대한 향수와 추모를 받고 있나 보다.


우리네 다카키 마사오 상에 대한 최근의 추모 분위기와 비슷한 싶지만 절대 아니다. 도리어 티토는 비록 노선은 공산주의였지만 유고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던져가며 싸워온 투사였고 그것을 입증해주는 역사적 사실은 너무나도 많다. 단순한 공산과격분자가 아닌 서방과도 함께 동반할 있음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도리어 자기네 맹주인 소련에도 과감히 쓴소리와 결단력 있는 행동을 보여주는 뚝심있는 사내였다고 본다. 영국수상 처칠이 그를 평가한 내용을 보면 더더욱.


그래서 비록 우리 대통령이었다지만 일제의 앞잡이 되어 독립군 잡으러 다니고 통일을 위해 자기몸 아끼지 않던 백범 선생 등을 암살하고 통일은 커녕 분단을 공고히 해서 자기들 권력유지에만 집념하고, 남의 나라 전쟁에 자국 젊은이들을 사지로 몰고 그나마도 월급 떼먹고... 등등. 그래서 지금의 다카키 마사오 상을 추모하는 인간들을 보면 역겁기 그지 없는 거다. 청렴했다고 하더니만 스위스 계좌며, 딸내미들과 일당들이 저질러 놓은 짓들 보면 뭐가 청렴하고 국가만을 생각한다는 것인지티토의 첫번째 부인의 아들은 전쟁중에 한쪽 다리를 잃었다. 부친 사후에 그에게 남겨진 재산은 양복 한벌. 살아 생전에도 티토는 자식이라고 봐줄 없다고 해서 되려 주변인들이 그래서야 되겠냐라고 이야기 했을 정도란다. 

아무튼 자꾸 이야기가 곁길로 새서 정리하자면 우리나라에도 티토같은 이들이 분명히 있었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럼에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이명박, 박근혜로 이어지는 패악의 세력들이 나라위에 군림하고 있다. 이들이 우리의 리더였다. 부끄럽지 않나?



I have faith in God.
나는 신을 믿는다.

I believe in friend.
나는 내 친구를 믿는다.

믿음, 신뢰? trust? faith? belief?

과연 믿음은 무엇일까? 아니 기독교인, 크리스챤에게 믿음은 뭘까?
지금 부적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송을 보면서 저들이 말하는 믿음은 생사화복을 중심으로 그것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하지만, 과연 예수를 구원자로 믿는 나, 또는 우리는 무엇이 믿는 것인가라는 물음을 다시 묻게 된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이지 생사화복을 잘 지켜 줄 것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
친구를 좋아하고 의지하니 믿는 것이지, 그가 나에게 베풀 것을 기대하고 믿는 것이 아니니까.

믿음이 간다 이런 말을 할 때 상대의 말과 행동이 일치할 때 사용하곤 한다.

말.

서로의 생각을 알려고 하면, 소통이 있어야 한다. 오고 가는 대화나 문장 속에서 상대의 생각을 알게 되고 나와 같은 점은 기뻐하고 다른 것이 있다면 더 깊은 대화를 통해 이해하거나 일치하거나, 아니면 그냥 인정하게 되던지.
또한 행동함으로 그 이해와 신뢰의 수준을 깊게 하는 것.
그래서 상대의 어렵거나 이해 못 할 상황에서도 기다려주고 헤아려주게 되는 것.
그 간에 쌓여가는 많은 작은 역사들, 히스토리.

그런데 지금의 신앙의 수준은 부적과 같아서 믿음의 주체인 나와 상대의 이야기가 아닌 그 결과물에만 주목하는 것이다.
만약 그 부적이 아무런 효험도 없었다면(내 생각에는 통계와 확률의 범주지만) 과연 방송에 나와 기쁨을 보여주고 무한한 신뢰를 보여줬을까?
많은 교회에서 회중기도, 새벽기도, 대표기도, 개인기도 중에 개인의 생사화복에 대한 간구로 넘쳐난다.
나와 하나님 간의 깊은 관계, 신뢰, 소통이 있다면 과연 그 초점이 저런 것에만 맞춰지게 될까?

이 글을 끄적이는 처음에는 부적과 믿음의 차이가 뭔가라고 하려했는데 쓰다보니 이 시점에 그간 성경을 멀리 하고 있던 나에게도 새로운 목적이 생긴다.
한 동안 왜 성경을 읽어야 하는가 하는 회의감이 들었었다.
주변에 보이는 성경통독, 성경백독, 성경필사 등등… 너무도 많은, 알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성경에 대한 행사들은 나같은 이들에게 되려 거부반응만 일으켜왔음을 고백한다. 성경을 백독했더니 병이 나았어요, 축복이 넘쳐요 등등. 그래서 대체 저 모습이 부적과 다를 게 뭔가라는 등등의 생각들.

물론 그 과정 속에 진정으로 하나님과의 대화의 장에 빠진 분들도 있겠다. 그래서 그런 노력과 수고를 폄하하고만 싶지는 않다. 그렇지만 마치 그것만이 목적인양 진리인양 나팔처럼 불어대는 소음이 너무 많아서 피로했다.

하지만 친구는, 신뢰하는 이는 서로 대화한다. 소통한다. 그것은 말이고 대화다.
하나님은 나에게 어떻게 소통하시는가? 성경 아니겠는가?

성경 아니라도 이 세상이 그 분의 존재를 알려주지 않는가라는 생각도 했었다. 굳이 성경 자주 안봐도 세상에 뿌려져 있는 하나님의 흔적만 봐도 은혜롭지 않은가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믿는 이가 멀리 있을 때 그를 그리워하며 그의 흔적을 통해 그를 기억하는 것도 있지만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한계가 있다. 그래서 간간히 편지도 하고 전화도 하고 여차하면 어디선가 만나서 서로의 안부를 묻기도 하는 것 아닐까? 그런데 나에게는 그 분이 남겨놓은 글들이 몇천년 동안 보존되며 여지껏 펼쳐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성경을 내 옆에 덩그러니 놓고 ‘봐라. 내 말이다. 쓸쓸해하지 말고 외로워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고 내 말이니까 늘 두고 봐, 곧 올게’라고 하시는데 이제 안 볼 수 있나?

라고 이렇게 끄적여놨는데 과연 1년 쯤 뒤에 나는 어디 즈음에 있을까? 그래서 주변에서 나를 체크해 줄 필요를 느낌. ㅎㅎ

참고 : http://ssje.org/ssje/2013/04/07/what-it-means-to-have-faith-in-god-br-david-vryhof/


국내에서 알려진 제목은 '로스트 인 더스트'
아마도 황량한 텍사스의 기후를 인용한 듯.

저런 풍경에서 집하나만 가지고 혼자 살아가고 싶은 생각이 마구 들게한다.

풍경과는 별개로 대를 이어지는 가난. 나라도 해결못하고 더 궁핍해지는 환경.
자식들에게만은 그 흐름을 끊겠다고 형과 함께 은행털이를 계획.
형은 동생을 대신해 희생되지만 살아남은 동생은 그 돈을 자신에게가 아닌 
모두 전처와 자식들에게 돌려준다.

언뜻 저런 행위가 정당한 건가라는 의문이 들지만 요즘 세상 돌아가는 거 보면, 특히 순siri나 재드래곤 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들의 것을 강제로라도 모든 국민에게 돌려줘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그 강제가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더라도. 그들이 이미 법의 테두리를 아니 테두리 안에 있는 듯 가장하여 심각히 벗어나 있는데도 정작 그 테두리안의 국민들에게는 룰을 지키라고만 한다. 세월호의 아이들에게처럼. 가만히 있으라고.

영화 내내 씁쓸했다. 마지막 그 황량한 텍사스의 모습이 주는 광활함이 마음속에 더해주는 퀭함...

Directed by David Mackenzie. With Dale Dickey, Ben Foster, Chris Pine, William Sterchi. A divorced father and his ex-con older brother resort to a desperate scheme in order to save their family's ranch in West Texas.
IMDB.COM


올해 초엔가 초등학교 6학년 큰 아들이 '트럼프처럼 저렇게 막말하는 사람이 어떻게 대통령이 되려고 할까요?'라는 질문을 했다. 그냥 맞장구 쳐 주려다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니 저 트럼프가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40대 이상이면 트럼프에 대해 많은 이들이 잘 아테다. '부동산 재벌'. 부동산이라는 단어는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부정적이긴 하지만 하여간 경영에 대해서는 매우 탁월한 사람이다라는 게 지금까지의 인식이었다.
그런 사람이 미대선에 나온다고 하더니 매일같이 막말파문을 일으키고 그 파문이 거대한 파도가 되서 결국엔 미국 대통령까지 가게 했다.

https://youtu.be/dE2Dl6E1AIQ

오늘 퇴근길에 우연히 80년대부터 지금까지 트럼프의 주요 인터뷰 또는 연설 장면을 보게 됐다. 자기 소신이 매우 뚜렷하고 똑똑한 사람인 것은 맞다. 게다가 그 영상을 보는 내내 작년에 매우 흥미롭게 봤던 책과 오버랩 되면서 더더욱 트럼프란 인물을 너무 가볍게 본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책은 '아틀라스'

출간된 지 반세기가 지났지만 여전히 백인을 중심으로 한 미 주류사회에서 계속 읽히고 있는 책. 주요 내용은 자본주의의 이상과 같은 유토피아는 왜 현실세계로부터 배척당하는 지, 미국이 지향하는 영웅은 누구인지에 대한 책이다. 계몽소설 같기도 하지만 미국이라는 나라의 생리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 그 책의 주인공과 같은 전능함, 초인성을 겸비한 인물로 현실 버전에 해당하는 게 트럼프 아닐까 싶다. 내가 그렇게 여긴다는 게 아니고 미국의 백인을 중심으로 한 중산층(또는 중산층에서 밀려나간 하위계층 포함해서)이 그렇게 열광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트럼프가 이명박과는 달리 자기 나라의 체질개선에 대해서는 나름 개선책을 가지고 진행할테고 나름대로의 성과를 얻을 것도 같다. 대선 중에 그의 막말은 계산된 매우 치밀한 막말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하며, 영상을 보니 그런 생각이 자연스레 들게 된다. 물론 한국의 이명박처럼 국가를 수익사업의 대상으로 전락시킬 가능성도 많다. 우리는 이미 겪어 봤잖은가?

아무튼 앞으로 미국은 자기 나라의 일에 점점 더 관심을 가지게 될 테고 그만큼 외부의 일에는 손을 놓게 될 테다. 어차피 세상의 대부분의 나라와는 대서양, 태평양을 두고 멀리 떨어져 있는 만큼 지정학적으로 자국에 대해서만 신경쓰는 게 가능한 형편이니까. 경찰국가? 이런거 개나 줘버려. 이런 생각을 확고히 굳히게 될 테고, 그 만큼 내 집 주변의 담장은 더 올릴테다. 내 코가 석잔데 남의 일에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기 싫다. 이건 거.

이제 팍스 아메리카는 한동안 사라질까? 그 공백이 주는 영향은 상상하기 힘들 듯 하다. 무주공산에 여우가 왕노릇 한다는 말도 있는데, 앞으로 우리나라 주변은 시끄러워 지겠다. 지금까지는 미국이 그래도 세계정세를 주도하려고 자기 집 사정이 안좋더라도 무리를 했지만 이젠 그런거 당분간 기대하기는 힘들테니. 미군의 철수 같은 것도 상대국가를 압박하기 위한 수단이었지 정말 빼내가리라고는 여지껏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젠 상황이 바뀌었다. 정말 나갈 수도 있다.... ㅎㅎ

미군이 빠지면, 물론 일본까지 빼지는 않으리라고 여기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일본에서도 발 뺄지도. 자국의 이익에 조금이라도 (-)가 되는 일에는 절대로 손대려 하지 않을 테니. 20세기 초의 일이 재현될까? 우리는 대통령 잘(?) 뽑아서 나라 기둥뿌리가 뽑히게 생겼는데, 그 기둥뿌리가 아예 뽑혀 나가게 될 지도 모르겠다. 중국의 한 성으로 편입될까? 남한은 한양성, 북한은 평양성 이렇게? 아니면 북한은 중국이 먹고 우리는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거나. '동북아는 그들이 알아서 하도록 둬!'라고 분명 천조국의 대장이 그럴테니.

힘의 공백으로 생기는 파장이 우리 삶에 어떻게 영향을 주게 될까?

트럼프가 여지껏 막말쇼를 보여줬지만 자기는 대통령이 되기 위한 연극이었을 뿐 지금과 크게 바뀌지 않으니 걱정말라고 하지는 않겠지?

제주 여행 루트 만들기(관광지만)





인쇄술이 보편화되기 전까지 사람들의 신앙은 생활 속에서 겪는 많은 일들을 통해 내면의 독백과 되새김을 거쳐 자라나고 이것을 공동체와의 나눔을 통해 성장했다. 하루하루의 삶속에 지쳐있는 사람들에게 신앙의 세계에 접촉할 수 있는 기회는 일주일에 딱 한 번의 예배였을 것이다. 그나마도 설교자 옆에서 또렷이 말씀을 들어보는 것은 감히 꿈에도 꿔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많은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믿음의 길을 걸었고 현대인들이 바라는 그런 성스러운 삶을 살았다. 요즘처럼 수많은 설교자의 주옥같은 말씀, 깊은 신앙의 세계로 안내할 책들을 전혀 접할 수 없었음에도 현대인에게 귀감과 도전이 되는 그들의 신앙은 어떻게 자라난 것일까?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이다라는 성경말씀처럼 들음에 있어서는 요즘과 비할 바 없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시기에 과연 어디서 들음을 얻을 수 있던 것일까?

반면 정보화시대 속 현대인은 평생 들어도 남아도는 수많은 설교와 신앙서적 속에 있다. 매 주일도 모자라 수요일, 금요일, 심지어 매일의 새벽예배. 주일 또한 한번의 예배가 아닌 시간대별로 쪼개 여러 예배가 있어 거의 매시간마다 주께 드리는 예배가 열리고 있다.

이러한 풍요함 가운데서 신자들의 믿음은 들음의 기회가 늘어남에 따라 같이 성장했을까? 이러한 의문을 가지는 것이 회의적인 것으로 여겨지겠지만 그럼에도 그 차이는 무엇인가 궁금해진다.

최근에 읽은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책에서 17세기 이후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에 힘입어 증가한 인쇄물이 인류에게 끼치는 영향을 보면 삶은 풍요로워지는 반면 점점 정신세계는 이전보다 되려 후퇴한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보여준다.

그래서 요즘 많은 사상가들은 인류 역사상 모든 면에서 가장 풍족한 이 시기가 인류가 퇴보하는 분기점이 아닌가라는 역설적인 평도 한다.

신앙의 세계도 마찬가지여서 말씀은 넘쳐나고 아멘의 소리는 전세계의 교회마다 커져만 가지만 정작 본질은 없고 껍데기만 남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현실화되는 것 같다. 우리나라만 봐도 불과 십수년전까지만 해도 교회는 사회를 받쳐주는 든든한 반석같았지만 지금은 기둥은 낡고 낡아 뭔가로 대체되어야 할 것 같은 위기 상황에 있다. 우리만의 문제는 아닌 것은 앞서 말한 내면은 텅 비어가는 인류의 현재 상황과 맞물려 전 세계적인 현상인 듯도 하다.

나의 생각은 없고 정리되지 않고, 쌓여있지도 않고, 되새김할 것이 없어 결국 말씀은 넘쳐나나 속에서 수용하지 못해 그냥 배설되어 버리는 것이다. 대체 이러한 상황은 어떻게 개선될 수 있을까? 생각없는 사람들을 다시 생각하는 존재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할까?



아이패드를 쓴 지도 벌써 햇수로만 7년째입니다. 아이패드 1을 미국에서 들어오시는 분을 통해 입수한 후로 아이패드 2, 3, 에어1 까지 참 애플에 충성스러운 고객임을 자처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안드로이드 쪽에서도 많은 태블릿들이 나왔습니다. 스마트폰과는 다르게 태블릿 카테고리에서는 워낙 아이패드가 강력하게 리드를 해서 사용하는 유저입장에서도 부족함이 없다고 느끼며 지내왔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갤럭시노트와 같이 펜의 입력도구를 차이점으로 부각하며 나오는 장비를 보며 뭔지 모를 부족함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분명 스티브 잡스는 열개의 손가락을 신이 주신 최고의 입력장비라고 한 적이 있었죠. 그 말을 들으며 저도 썩소를 날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잡스어록을 금과옥조처럼 받드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저 부분에서 저는 잡스의 언행이 일치하지 않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잡스는 대학시절에 서예에 같은 캘리그라프 과목을 청강하면서 폰트의 중요성에 눈 떴던 것으로 압니다. 캘리그라프는 최근에도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는 분야로 취미 또는 아예 전업으로 하는 분들이 있을 정도죠. 그 캘리그라프, 서예, 펜글씨 모두 펜과 같은 입력도구를 이용합니다. 금속성 펜촉의 질감과 필압을 이용한 다양한 글씨체의 변화는 손가락만으로 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닌 거죠. 서예도 붓을 구성하는 털의 종류, 크기에 따라서 다양한 서체를 만들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손가락 말고도 입력에는 여러 도구들이 존재하며 나름대로의 영역이 오랜 세월 구축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애플펜슬 이전부터 여러 스타일러스들이 있었고 저 또한 사용해봤습니다만 입력의 신속, 정확한 점에서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애플만의 스타일러스를 원해왔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패드 프로 시리즈를 통해 애플펜슬을 쓸 수 있게된 것은 애플이 늦게서나마 저 부분을 이해해주고 조금씩 잡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 아이패드프로 9.7

저는 아이패드 프로 9.7과 애플펜슬을 한국출시에 맞춰 구매했습니다. 아이패드는 에어1때와 같이 애플 공홈을 통해 셀룰러 모델로 했습니다. 아이폰의 데이터를 공유하는 '데이터쉐어링' 상품을 쓰는데 프로모션이 되서 실제 사용료는 없습니다. 요즘은 아이폰의 핫스팟 기능을 자연스럽게 이용해서 와이파이 모델만으로도 잘 된다고 하지만 아이패드만을 가지고 있는 경우와 같은 결정적인 상황에서 셀룰러 기능의 부재가 커서 전 에어 이후로 셀룰러만을 이용합니다. 덤으로 GPS 기능이 있는 것도 매력적입니다.


프로 시리즈가 에어의 확장이냐 아니냐를 가지고 논란이 좀 있는 것 같습니다. 6월 이후에 에어 3가 나올테고 프로 시리즈가 팽 당할거라는 둥 말이죠. 어찌됐든 애플펜슬 하나만으로도 프로의 가치는 아주 높습니다. 여하튼 에어 1을 써왔던 저로서는 프로로 넘어와서 크게 성능의 향상을 느낀다거나 하는 것은 없었습니다. 에어1의 성능으로도 충분했습니다. 


스펙을 봐도 클럭이 올라가고 램이 늘었지만 주로 사용하는 앱들이 성능을 요구하는 것들이 아니다보니 프로로 넘어와서도 성능에 따른 만족도는 그저 그렇습니다. 다만 지문인식이라던지 스테레오 스피커 지원 같은 것은 좋습니다. 또 살짝 얇아지고 무게도 가벼워진 점도 좋죠. 이미 아이패드 프로 12인치 이후로 많은 분들의 사용기가 올라오고 있으니 저의 아이패드 프로에 대한 평가는 이 정도에서 마치겠습니다.



▶ 다음은 애플펜슬.


제가 굳이 아이패드 프로로 넘어오게한 원흉(?)인 애플펜슬입니다. 가격이 비싸다고들 하는데 제 생각엔 성능에 비해 오히려 싼 게 아닐까 싶을 정도입니다.^^

제품은 잘 아시다시피 애플펜슬과 펜촉 여분 1개, 그리고 라이트닝 케이블 연결 젠더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갤럭시 탭이나 노트, 그 외의 태블릿 지원 스타일러스들은 기능만을 위해 디자인을 삭제하다시피 한 게 많았습니다. 물론 태블릿에 수납하도록 해서 휴대성을 높이기는 했지만 입력을 하는 의미는 글짜의 모양이이라는 가장 중요한 요소를 감안했을 때 극악스러운 파지법을 유발하는 것은 그간 정말 제가 혐오하다시피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애플펜슬의 디자인은 여지껏 수세기간 이어져 온 인류의 입력도구인 붓, 펜, 연필의 그것을 그대로 이어놨습니다. 저는 참 잘한 점이라고 여깁니다. 꼭 태블릿과 함께 있어야하는 것보다 입력도구 그 자체의 존재감을 부각하는 거 말이죠. 그래서 주머니에도 넣고 별도로 보관하기도 하고 - 소중한 도구인 것입니다. 저도 소시적엔 한 붓글씨 했었는데 그 때 몇십만원 주고 산 좋은 붓은 다른 붓들과는 다르게 보관하며 소중히 여겼던 것이 떠오릅니다.

실제로 손에 쥐어서 입력하면 예전 느낌 그대로입니다. 다만 종이에서 유리위에 쓰는 게 달라진 점입니다. 그래서 좀 미끄럽다는 것과 종이에 쓸 때처럼의 질감은 느낄 수 없습니다. 이 부분도 앞으로 기술의 발전에 따라 지원 가능할까요? 아니면 그냥 고대유물과 같은 것으로 치부될 지는 지나봐야 알겠죠. 앞으로의 세대가 이전세대와 같이 종이를 접할 기회는 점점 줄어들 테니 말입니다.

자~ 좋은 입력도구가 있으면 그에 걸맞은 앱도 있어야겠죠? 워낙 많다보니 그 중 몇가지만 제가 잘 쓰는 앱을 말씀드리면 저는 노트앱으로 'NOTESHELF', 'PENULIMATE'를 씁니다. noteshelf는 예전부터 써왔던 앱이라 gootnote와 같은 앱과 비교해서 어떨지는 몰라도 저에게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penultimate는 잘 알려진 대로 evernote에서 인수해서 그런지 작성된 페이지는 자동으로 에버노트와 싱크되는 편리함이 있습니다. 가장 가볍게 편하게 쓸 수 있는 점도 좋습니다. ’Procreate’과 같은 편집툴은 간간히 사용하기 하는데 역시 펜슬이 있고 없고에 따라 품질이 확연히 달라지네요. 그만큼 세밀한 터치가 가능해서이죠. 그 외에는 특별히 더 써 본 앱이 없는데요 더 필요한 용도가 없어서이기도 합니다. 



이제 사용한 지도 한달이 지나가는데 몇가지 단점이 눈에 띄기는 합니다. 먼저 장시간 미사용 시 연결해제가 되는데 이 경우 다시 연결하는 방법은 블루투스 설정에 들어가거나 펜슬을 직접 아이패드에 연결하는 건데 이 때 좀 모양새가 어중간해서 어디다 놓기가 애매한 부분이 있습니다. 



또 기본적이 재질 탓이기도 하지만 아이패드 유리면에 닿아서 글을 쓸 때 미끄러지는 느낌은 분명 펜을 쓰는 것과는 다른 이질감이 있습니다. 애플펜슬팁을 좀 더 마찰력이 있는 재질로 바꿔서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상 1개월 간 아이패드프로 9.7과 애플펜슬 사용후기였습니다. 

역시 마지막엔 이거 누구에게 추천해야 할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지껏 여러 스타일러스로 고민해 온 아이패드 유저가 있으시다면 매우 강력히 추천합니다. 이전과는 다른 세계가 열린다고 장담합니다. 물론 스타일러스 없이 잘 사용한 분들께는 그다지…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