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균을 보내고 나니 이 드라마가 너무 보고 싶어졌다. 묵직한 중저음의 그가 왜 이리도 안타깝게 느껴지는 걸까 싶어서.

드라마도 그가 최근에 겪은 일들의 총합인 듯 인생의 무게를 혼자서 짊어지고 가는 40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드라마 종반에 가까이 와서인가, 해외에 유학 중인 아들을 보러 아내가 없는 거실에서 혼자 있다 감정에 북받쳐 우는 모습에서는 왜 저러는지 그냥 공감이 되는 장면이 있었다. 뭔지 모를 인생의 버거움과 외로움이었니 않을까?

인간은 사회를 벋어나서 살아갈 수 없다고 하고 그래서 공동체가 필요하다지만 결국 삶의 본질적인 문제는 인간 개인 스스로의 몫이다. 그러기에 누구도 그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거나 대신 저줄 수 없다. 결국 스스로가 그걸 헤쳐나가고 극복하는 수밖에 답이 없다. 물론 도움은 받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그런 점에서 보는 내내 ‘박동훈’이라는 인물이 부모, 형제, 아내, 동료, 선배, 후배 등등 수많은 인연들로 둘러싸여 있었음에도 계속 마음 속에 뜻 모를 짐들이 자리 잡고 있었고 그로 인해 힘들어했음에 많이 공감이 갔다.

인간은 외로운 존재다. 같은 인간끼리는 그 외로움을 본질적으로 없앨 수는 없다. 결국 전혀 다른 존재의 개입만이 답이지 않을까. 하나님만이, 예수님만이.

그래서 이선균의 자살은 참 안타깝고 아쉽다. 드라마에서처럼 ‘아무 것도 아니야’라고 누군가 얘기해 주었다면.

그런 지점에서 대체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같은 편이 되어주지는 못할 망정, 외면하고 정죄하기에 급급한 현실을 보자니 말이다. 아마 앞에서는 아니라도 저 멀리서 뒷짐 지고 혀나 끌끌 차고 있지 않았을까?

 

My Mister (2018) on IMDb

#나의아저씨 #이선균 #존재 #인생 #삶

 

아랍, 그곳에도 사람들이 살고 있다 - 10점
팀 매킨토시-스미스 지음, 마틴 요먼 그림, 신해경 옮김/봄날의책

 

“저자는 이슬람 여행자들의 수호성인인 알-카디르와 영국의 수호성인인 성 조지가 같은 인물이라는 걸 깨달았고, 무슬림인 이바가 들어가지 못했던 하기아 소피아 성당 내부를 이바를 대신해 돌아본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슬람과 그리스도교의 상징, 이슬람의 추상화된 하나님과 그리스도교의 인간화된 하나님 형상이 나란히 걸린 것을 발견한다.

성인들의 무덤을 찾으며 작은 기적을 입기도 했던 이집트는 격렬한 아랍의 봄을 앓으며 무바라크를 축출하는 데 성공했지만 처음으로 국민들이 뽑은 대통령은 군부 쿠데타로 축출되어 지금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 바바를 만나 세마의 감동을 맛보았던 터키는 최근에 수도 앙카라에서 일어난 대규모 폭탄테러를 포함하여 곳곳에서 폭탄테러가 벌어지고 있다. 글자 그대로 이름이 없는 '익명' 호텔에서 보드카에 취해 춤을 추었던 크림자치공화국은 우크라이나와 결별하고 러시아에 병합되어 새로운 냉전체제의 도화선이 되었다.

~

그리고 시리아. 천 년 묵은 수차가 돌고, 지옥 위에 산상 노인의 성채가 펼쳐졌던 그곳은 벌써 4년 반이 넘도록 전쟁에 시달리고 있다. 연일 공습이 계속되고 정부군과 반군, 수천 년 된 유적들을 여봐란 듯이 파괴해버리는 IS가 날뛰는 그 땅에서 벌써 25만 명이 숨을 거두었고 인구의 반이 난민이 되었다. 전 세계 국가들이 국경을 닫아걸고 있다. 어쩌면 수많은 사람들이 벌써 마음을 닫아걸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환대가 없는 시대를 살아가야 할 처지에 놓였다.

그곳의 사람들은 아직 14세기의 마음을 지니고 있다. 저자는 탕헤르의 택시 운전사에게서 축복을 받았고, 이집트 사막 한가운데에서 만난 여인들에게서 포용을 얻었으며, 함께 탐험에 나서준 영민한 터키 소년에게서 우정을 구했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그중에서도 이바 시대의 파편을 가슴속에 지닌 사람들이야말로 저자가 찾고자 했던 이바의 환생, 가뭇없이 사라질지도 모르는 공존과 조화의 시대를 붙잡아줄 마지막 희망일 것이다.” <옮긴이의 후기 중>

책 제목이 원어 제목과 다른 점이 다분히 의도적이기는 하지만 이 책의 숨겨진 의도(라기 보다는 의도하지 않은)아닐까 싶다.
요즘 나라와 나라, 종교와 전쟁, 민족과 민족, 지역과 지역 간 크고 작은 분쟁과 전쟁이 여기저기서 보인다. 저 위 정치적인, 저 아래 개인 대 개인 간의 다툼이나 이견으로 시작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가까이서 터 놓고 지내보면 결국 아무것도 아닌 일일 수도 있는데 안타깝다. 거창하게 대의, 명분, 정의를 부르짖다가 결국 원래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내놓게 된다. 물론 모든 경우가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대다수는 알고보니 어이없는 것으로 시작되는 수가 있다는 것.

아무튼 이 책 읽는 내내 어려운 점이 하나 있었는데 지명이며 인물 이름이여 대다수 '[알(al)'이 붙다보니 혼란스러웠다. 그 지역의 특성이니 감수할 사항이긴 하다. 게다가 저자는 동일한 이름의 반복을 꽤 피하고자 한 듯 해서 방금 지목한 사람의 이름이 곧 다른 별칭으로 바꿔버리다보니 글 읽는 내내 무슨 미로 속에서 길 찾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럼에도 요즘같은 코로나 시국에 북아프리카에서 시작해 아라비아 반도, 레반테 지역, 아나톨리아, 마지막으로 요즘 가장 핫한 크림반도를 대신 다녀올 수 있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고 매력적이다. 좀 더 재미있게 보려면 구글어스같은 맵 어플 옆에 끼고 해당 지역의 사진과 지형을 참고하면 너무 좋다. 14세기의 이바가 이십년 넘게 저 지역들을 다녔다면 21세기의 저자는 비행기와 차량을 통해 짧은 기간에 추적했다. 그렇다면 2022년을 살고 있는 우리는 스마트기기까지 더해서 그냥 앉은 채로 그 지역을 찾아가 볼 수도 있다. 다만 여지껏 배경지식을 알 수 없어 헤맬 수밖에 없었다면 이 기회에 저자를 믿고 따라가보면 재택여행이 충분하리라 본다.

 

 


사소한 정의 - 10점
앤 레키 지음, 신해경 옮김/아작



이 책을 알게된 것은 #페미니즘 이 반영된 SF 소설이라는 주간지 서평을 통해서다. 요즘 우리 사회의 화두 중 하나인 페미니즘이다 보니 SF와 결합한 페미는 어떤 느낌인가 싶어 골라봤다. 그래서 이 책의 모든 등장인물은 He가 아닌 She, 그녀들이다. 심지어 인공지능과 같은 가상인격도.


물론 그들, 또는 He 들도 있기는 한 것 같지만 여하튼 POV는 그녀들의 시선을 통해서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녀의 불평등에서 비롯한 문제를 부각 시키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관점만 바뀐 거다. 이게 처음엔 꽤 어색하긴 하다. 대체 언제쯤 '그'가 나오나 기다려질 정도 였다. 물론 그런 일은 없다.


앞서 페미니즘을 이야기했고 그런 평이 있지만 정작 소설의 주제는 그와는 관련이 거의 없는 듯 하다. 배경설명이 전무해서 그런 지도 모르겠다-예를 들어 왜 여성성(性)이 주된 성(sex)이 됐는가 등에 대한 것들 말이다.
여하튼 보는 이마다 각각 이겠지만 '나'라는 것을 정의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이런 주제는 사실 많은 SF작품을 통해 제기된 흔한 이야기이도 하다. 그렇지만 이 책처럼 수량적으로 시간적으로 스케일을 크게 잡은 경우는 흔하지 않다. 
그리고 ‘#사소한_정의’, 원제는 ‘Ancillary Justice’인 정의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사소한’이라는 단어와 ‘부가적’이라는 뜻을 포함하는 ancillary라는 단어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아무튼 소설 속에서 더불어 순간순간의 상황 속 사소한 듯한 정의에 대한 결정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떤 결과를 만들 지, 그것이 과연 거대한(?) 정의(Justice)를 이루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 가를 이야기한다. 카오스 이론의 영향을 따른 듯 한데 이 또한 흔한 소재이긴 하다. 
그런데 이 두 소재를 그녀의 관점으로 부드러우면서도 가볍지 않게 잘 버무려놨다.


이전에 존 스칼지의 ’노인의 전쟁’이라는 책과 그 시리즈를 읽었다. 역시 스페이스 오페라로 구분되는 유사한 장르의 책이다. 거기서도 작가 앤 레키와 같이 복제인간을 통해 ‘나’를 정의하는 것이 미래세계에서는 지금과는 현저히 달라질 것을 예고하고 있다. 다만 페미니즘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스컬지와 레키의 작품의 차이점이 나타나는데 노인의 ‘전쟁’이라는 제목처럼 유혈이 낭자한 묘사가 많고 전투장면들이 박진감 있게 묘사된다면 ‘사소한 정의’는 그 보다는 훨씬 차분하고 정적인 편이다. 그래서 1백여 페이지가 넘어가기 까지는 매우 지루한 감도 있어서 읽는데 매우 주의를 요한다. 물론 후반부 클라이막스에 이르러서는 호흡이 가빠지게 하는 장면들이 등장하지만 역시나 매우 절제된 듯한 느낌이다.


간만에 좋은 작품을 만났다. 주제도 좋고 우주를 배경으로 해서 스케일도 만족스러운 책이다. 시리즈라는데 다음 작품도 봐야겠음.


바람의 그림자 1

바람의 그림자 1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저/정동섭

1945년 여름, 스페인 내전 직후의 바르셀로나에 다니엘이란 이름을 가진 어린 소년이 아빠의 손에 이끌려 미명에서 깨어나는 도시의 거리를 걷고 있다. 어릴 적 엄마를 잃은 아들을 위로하기 위해 아빠는 '잊혀진 책들의 묘지'로 데려간다. 이곳의 기본 수칙은 첫 방문 시 자신만의 책 한 권을 얻을 수 있는 대신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누설할 수 없다는 점! 다니엘이 우연찮게 고른 책은 훌리안 카락스라는 자가 쓴 『바람의 그림자』이다. 후에 놀랍게도 다니엘은 훌리안의 모든 작품들을 불살라버리고 그의 흔적을 지워버리려는 검은 사내와 맞닥...





바람의 그림자 중.
La Sombra del Viento
- Carlos Ruiz Zafon


p.390
독서라는 예술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고.
그것은 내밀한 의식이라고.
책은 우리가 이미 우리 안에 지니고 있는 것만을 보여주는 거울이라고.
독서할 때 우리는 정신과 영혼을 건다고.
위대한 독서가들은 날마다 더 드물어져가고 있다고.

p.401
머리와 가슴과 영혼이 있는 남자
자식의 말을 경청할 줄 알고, 자식을 이끌어주면서도 동시에 존중할 줄 아는 남자
하지만 자기 결점을 자식한테서 보상받으려 하지 않는 남자
자식이 그저 아버지라서 좋아해 주는 남자 말고 인간 됨됨이 때문에 존경하는 남자, 아이가 닮고 싶어하는 남자

바르셀로나
- 다니엘과 아버지의 서점 : 사나 아나 가(街)
- 클라라 : 레알 광장
- 오랜시간의 흐름에도 품위를 유지하는 : 아테네오
- 고독한 포르투니의 : 론다 데 산 안토니오
- 카탈루냐 광장
- 누리아의 집이 있는 : 산 펠리페 네리 광장
- 티비다보 애비뉴 : 32번가 근처와 전차와 석양


이와이 슌지의 ‘러브레터’를 보고 있자면 언젠가 저곳에 꼭 가보고 싶다는 동경이 든다. 백색의 설원과 그 황량함을 느껴보고 싶기 때문에.
이번에 읽은 카를로스 루이스 샤폰의 ‘바람의 그림자’를 읽는 내내 바르셀로나의 그곳들에 대한 그리움이 솟아난다. 가보기는 커녕 영상으로만 접해본 곳인데도 읽는 내내 그곳을 거닐고 있다는 착각이 든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의 읽는다는 의미와는 달리 독자의 머리 속에서 각종 허구와 상상을 조합해 읽는 이만의 세계가 만들어지게 한다. 그래서 동일한 줄거리를 가짐에도 읽은 이에게 투영되는 세상은 모두 다른 색과 구조, 모양을 가지게 될 거다. 바르셀로나의 실재하는 지명과 거리는 등장인물들을 중심으로 읽은 이의 마음속에서 길위의 다양한 사람들과 움직이는 것들, 하늘, 바다, 소리들로 채워진다.
바르셀로나는 그러한 모든 것들이 채워지기 전의 하얀색의 도화지 같은 것. 그 어는 것도 그려지기 전의 날 것 그대로의 바르셀로나를 접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진다. 언젠가 가 볼 일이 있을 것으로 여기며.

등장인물 정리




힐빌리의 노래

힐빌리의 노래

J. D. 밴스 저/김보람

아마존닷컴 종합 1위, 「뉴욕타임스」 논픽션 1위, 빌 게이츠와 소설가 김훈이 추천한 화제의 책
빈곤과 무너져가는 가족, 그 어둠 속에서 일어선 한 청년의 진솔한 성장기

‘힐빌리’는 미국의 쇠락한 공업 지대인 러스트벨트 지역에 사는 가난하고 소외된 백인 하층민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저자 J. D. 밴스는 힐빌리 출신의 32살 청년으로, 약물 중독에 빠진 어머니와 수없이 바뀌는 아버지 후보자들, 그리고 다혈질에 괴팍한 성미를 가졌지만 손자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조부모 밑에서 자라며 윤리와 문화의 붕괴, 가족...



이 책을 읽은 내내 떠오르는 영화가 있다. ‘Winter’s Bone’과 ‘길버트 그레이프(What's Eating Gilbert Grape)’. 거친 숲, 눈, 바람, 황량함, 쓸쓸함, 고독함, 무력감. 그 속에서 피어 오르려는 작은 희망도 있긴 하다.

물리적 환경도 그럴 수 있겠지만, 삶을 둘러싼 환경이 그러한 곳이 저자의 고향이다. 그리고 그곳에 사는 이들을 ‘힐빌리’(관련이미지)라고 부른다. 우리로 치면 OO촌뜨기 정도?

지은이는 자신의 성공을 자기 지역의 사람들과는 달리 그의 앞에 열려진 길과 환경이 너무도 운이 좋았다라고 말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이 있지만, 그런 노력을 해도 안되는 이들이 수두룩 함에도 저자 J.D.밴스는 정말 하늘이 도운 케이스일 듯 하다. 엉망인 상태의 어머니 밑에서 아버지라고 불리울 만한 사람만해도 여러명인 상황.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부모의 도움을 전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도 할모, 할보로 칭해지는 조부모들 덕에 침몰하지 않고 간신히 버텨간다.

힐빌리가 그렇게 좋은 뜻은 아니더라도 지역 자체의 분위기는 대가족 중심의 공동체를 근간으로 한다. 그래서 그것이 밴스에게 운으로 작용한 것인지도. 조부모의 지속적이고 강인한 도움이 그나마 그를 고등학교까지 이끈 듯 하다. 그럼에도 이후의 과정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어찌하여 해병대를 거쳐 자신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터득하는 것도 그렇고 오하이오 주립대까지 가는 과정, 예일대 로스쿨까지의 여정은 중류층 이상의 가정환경과 사회적자본(인맥이라고 책에서 본다)을 가진 이들에게는 어느 정도의 노력만으로도 충분히 달성할 수 있는 일일런지도 모르지만 힐빌리 출신에게는 그런 삶과 방식이 존재하는 지조차도 알 수 없다.

미국이라는 사회는 늘 ‘아메리칸 드림’으로 외부에 포장되어 있고, 한국에 사는 나같은 사람들은 기회의 땅, 성공의 가능성이 널려있는 땅에 사는 저 USA들은 정말 좋겠다라는 막연한 부러움 속에 살아간다. ‘미국 거지도 영어를 잘하더라’라는 자조섞인 영어부심도 그렇고.

그런데 정작 그 미국 땅에 살아가는 상당수의 미국인, 그것도 주류로 여겨져 왔던 백인 사회 안에는 여지껏 외부세계에 잘 알려지지 않은 계층이 존재한다. 물론 20세기 후반부터 미국사회에서도 그 문제가 점점 부각되면서 알려지기는 했어도 이 책에서 보여주는 것만큼인지는 몰랐다.

기회의 땅이리라 여겼지만 그 기회조차 존재하는 모르는 채로 살아가는 많은 힐빌리들. 기회와 그 기회를 잡는 방법을 모르니 자기 자신이 포기한 줄도 모르고 그냥 살아간다. 포기는 그 목표를 알기라도 한다지만 그 목표가 존재하는 지도 어떻게 잡는 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게 지금 미국의 하위 백인 노동자계급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시민의 계급이 없고 평등한 위치에서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경쟁을 하는 것이라고 여겨져 왔다. 계급이 아예 없을 수는 없겠지만 이 정도까지 이리라고 생각해보지는 못했다. 특히 미국이라는 사회에서.

실례로 지은이가 나온 오하이오 주립대는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상당한 금액의 장학제도가 있다. 당연히 그런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안다면 기회로 삼을 수 있을 텐데도 그 혜택을 전혀 이용 못하고 있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부모의 무관심, 주변 사회의 무지함. 개인의 나약함 등이 부정적 시너지를 낸 결과다.

미국 교육체계가 문제 많다며 오바마를 비롯한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은 교육시스템을 개혁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럼에도 문제의 해결이 더딘 것은 정작 시스템에만 있는 문제만이 아니라 교육의 대상인 사람과 그 사람들의 모임인 공동체에 큰 문제가 있다.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낸 지지층이 바로 이 힐빌리와 같은 백인 노동자 계층이다. 문제의 원인을 외부의 탓으로만 돌리며 그 해결을 트럼프에게 맡기면 해결되리라는 극히 수동적이면서 외부세계에 적대적인 그들이다. 정작 문제해결의 근원은 자기 자신들임을 모른는 것인지, 아니면 알고도 극도로 외면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사회도 점점 저렇게 되어 가는 듯 하다. 양극화라는 말이 십수년 전에 어느 대통령님을 통해 알려지면서 그 단어는 자신의 존재감을 더 굳혀간다. 금수저, 흙수저, 88만원세대와 같이 나이와 지역, 출신에 따른 계층의 분리와 격차는 점점 일반화되고 깊어져 간다.

두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의 입장에서 이 책을 보는 내내 내 아이들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나는 얼마나 단호하고 강한 책임감으로 아이들을 키워가고 있는가? 제대로 된 정보와 지식으로 아이들을 케어하고 독려하고 서포트하는가? 그리고 동시에 과연 나의 가정은 화목한가? 아이들이 안심하고 그 둥지에서 마음 놓고 자신들의 꿈을 키워가게 하는 가 등등. 정말 자신없는 질문들이다.

저자는 정말 운이 좋았던 것은 틀림없다. 친척 중에 단 한명의 전문대 이상 졸업자도 없는 상황에서 예일대 로스쿨을 나와 유명 법조인이 된다는 게 글로 보고 말로만 들어서 그렇지 사막 한 가운데 떨어져서 길을 찾아가는 것과 다름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 중에 ‘에이미 추아’ 교수가 등장한다. 그 이름을 보는 순간 예전에 읽었던 ‘제국의 미래’의 저자임과 동시에 ‘타이거맘’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 중국계 교수다. 맹렬한 자녀 교육의 대명사. 그 교육방식에 대한 찬반논란은 여전하지만 정작 저자를 대하는 에이미 교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스승의 모습이다. 타이거맘이라는 표현이 분명 과하고 실제로도 그랬던 모양이지만 자식을 세상에 내보내기 전까지 그 아이가 세상에 적응하게 하려는 부모의 노력은 분명히 있어야한다.

힐빌리로 불려지는 애팔래치아 - 미북동부 지역 백인하위층의 이야기는 우리와 비교할 때 같지는 않고 그대로 불러다 쓸 수는 없지만 그것이 주는 느낌은 상당히 공감할 수 있다. 책을 보다보면 성공담에 대한 이야기인가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그 성공이 정말 어려운 것이고, 저자와 같은 상황에서라면 성공이란게 있는 것인지도 모르는, 그 절망적인 시절을 살아가는 이들에 대해 글쓴이는 세상에 알리고 변화를 요구하는 내용이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요즘 애들은 끈기가 없어’라며 개인의 낙오를 꾸짖는 주변의 꼰대들의 충고(이에 대해선 할 말이 많지만 관련 기사로 대신한다,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운이 더 중요한 이유' http://ppss.kr/archives/78599)가 아닌 그 문제의 원인이 개인과 가족, 공동체 모두에게 똑같이 있으니 함께 관심을 가지고 접근해야 한다고 하는 듯 하다. 여기에 정부와 같은 시스템의 개입이 더해지면서 효과가 나리라 보는 것이다.






재스퍼리들리의 [티토:위대한 지도자의 초상] 읽음. 5.0




티토

티토

유경찬

불과 20여년 전만 해도 옛 유고슬라비아는 동구권에서 안정되고 잘살던 나라로 평화와 번영을 누리던 나라였고, 당시 그 핵심에는 '티토'라는 인물이 존재하고 있다. 강력한 의지와 카리스마를 지닌 위대한 지도자로 남아 있는 티토 대통령에 대한 생생한 다큐멘터리로서의 이 책은 티토의 어린시절에서부터 생을 마감하기까지의 행적을 추적하고 있다.전세계인의 기억에 깊이 남아있는 티토의 독보적인 업적을 소개하고, 이를 통해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유고슬라비아를 한 나라로 묶었으며, 동서양이라는 굴레를 앞세운 강대국들의...


책을 읽는 동안 작년에 다녀온 유고연방의 여러 지역들이 떠올려졌다. 지형이며 도시들이 속의 내용과 오버랩되면서 이해하는 상당한 도움이 됐다예전 중고등학교 시절 3세계의 리더라고만 배운 피상적인 인물이 피부에 와닿듯이 실제적으로 느껴지게 준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지역의 인물에 대해 나온 책이 얼마나 되겠나 싶다. 강대국도 아닌 그나마 유고연방으로 존재했을 때와는 달리 원래의 소국들로 나뉘어져 버린 지금에선 더더욱.


티토라는 인물에 대해 마디로 해보라면공산주의자 , 아닌 듯한 매력적인 인물이다. 어떻게 보면 진정한 공산주의를 바라고 추구했었던 사람인 같으면서도 되려 그렇지 못해 어정쩡한 스탠스를 취한 그러면서도 시대의 운을 타고나 천수를 누린 천운을 가진 사나이라고 할까?


그의 사후 유고는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 코소보, 세르비아, 보스니아에서 벌어진 인종청소 등으로 인해 인간의 잔학성을 보여주는 동네가 되어 버렸다. 그렇지만 참상을 겪은 후에 도리어 티토는 그가 티토였는지를 다시금 알게 해주면서 지금은 생전만큼은 아니어도 그에 대한 향수와 추모를 받고 있나 보다.


우리네 다카키 마사오 상에 대한 최근의 추모 분위기와 비슷한 싶지만 절대 아니다. 도리어 티토는 비록 노선은 공산주의였지만 유고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던져가며 싸워온 투사였고 그것을 입증해주는 역사적 사실은 너무나도 많다. 단순한 공산과격분자가 아닌 서방과도 함께 동반할 있음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도리어 자기네 맹주인 소련에도 과감히 쓴소리와 결단력 있는 행동을 보여주는 뚝심있는 사내였다고 본다. 영국수상 처칠이 그를 평가한 내용을 보면 더더욱.


그래서 비록 우리 대통령이었다지만 일제의 앞잡이 되어 독립군 잡으러 다니고 통일을 위해 자기몸 아끼지 않던 백범 선생 등을 암살하고 통일은 커녕 분단을 공고히 해서 자기들 권력유지에만 집념하고, 남의 나라 전쟁에 자국 젊은이들을 사지로 몰고 그나마도 월급 떼먹고... 등등. 그래서 지금의 다카키 마사오 상을 추모하는 인간들을 보면 역겁기 그지 없는 거다. 청렴했다고 하더니만 스위스 계좌며, 딸내미들과 일당들이 저질러 놓은 짓들 보면 뭐가 청렴하고 국가만을 생각한다는 것인지티토의 첫번째 부인의 아들은 전쟁중에 한쪽 다리를 잃었다. 부친 사후에 그에게 남겨진 재산은 양복 한벌. 살아 생전에도 티토는 자식이라고 봐줄 없다고 해서 되려 주변인들이 그래서야 되겠냐라고 이야기 했을 정도란다. 

아무튼 자꾸 이야기가 곁길로 새서 정리하자면 우리나라에도 티토같은 이들이 분명히 있었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럼에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이명박, 박근혜로 이어지는 패악의 세력들이 나라위에 군림하고 있다. 이들이 우리의 리더였다. 부끄럽지 않나?



국내에서 알려진 제목은 '로스트 인 더스트'
아마도 황량한 텍사스의 기후를 인용한 듯.

저런 풍경에서 집하나만 가지고 혼자 살아가고 싶은 생각이 마구 들게한다.

풍경과는 별개로 대를 이어지는 가난. 나라도 해결못하고 더 궁핍해지는 환경.
자식들에게만은 그 흐름을 끊겠다고 형과 함께 은행털이를 계획.
형은 동생을 대신해 희생되지만 살아남은 동생은 그 돈을 자신에게가 아닌 
모두 전처와 자식들에게 돌려준다.

언뜻 저런 행위가 정당한 건가라는 의문이 들지만 요즘 세상 돌아가는 거 보면, 특히 순siri나 재드래곤 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들의 것을 강제로라도 모든 국민에게 돌려줘야 하는 것 아닌가 싶다. 그 강제가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더라도. 그들이 이미 법의 테두리를 아니 테두리 안에 있는 듯 가장하여 심각히 벗어나 있는데도 정작 그 테두리안의 국민들에게는 룰을 지키라고만 한다. 세월호의 아이들에게처럼. 가만히 있으라고.

영화 내내 씁쓸했다. 마지막 그 황량한 텍사스의 모습이 주는 광활함이 마음속에 더해주는 퀭함...

Directed by David Mackenzie. With Dale Dickey, Ben Foster, Chris Pine, William Sterchi. A divorced father and his ex-con older brother resort to a desperate scheme in order to save their family's ranch in West Tex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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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술이 보편화되기 전까지 사람들의 신앙은 생활 속에서 겪는 많은 일들을 통해 내면의 독백과 되새김을 거쳐 자라나고 이것을 공동체와의 나눔을 통해 성장했다. 하루하루의 삶속에 지쳐있는 사람들에게 신앙의 세계에 접촉할 수 있는 기회는 일주일에 딱 한 번의 예배였을 것이다. 그나마도 설교자 옆에서 또렷이 말씀을 들어보는 것은 감히 꿈에도 꿔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많은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믿음의 길을 걸었고 현대인들이 바라는 그런 성스러운 삶을 살았다. 요즘처럼 수많은 설교자의 주옥같은 말씀, 깊은 신앙의 세계로 안내할 책들을 전혀 접할 수 없었음에도 현대인에게 귀감과 도전이 되는 그들의 신앙은 어떻게 자라난 것일까?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이다라는 성경말씀처럼 들음에 있어서는 요즘과 비할 바 없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시기에 과연 어디서 들음을 얻을 수 있던 것일까?

반면 정보화시대 속 현대인은 평생 들어도 남아도는 수많은 설교와 신앙서적 속에 있다. 매 주일도 모자라 수요일, 금요일, 심지어 매일의 새벽예배. 주일 또한 한번의 예배가 아닌 시간대별로 쪼개 여러 예배가 있어 거의 매시간마다 주께 드리는 예배가 열리고 있다.

이러한 풍요함 가운데서 신자들의 믿음은 들음의 기회가 늘어남에 따라 같이 성장했을까? 이러한 의문을 가지는 것이 회의적인 것으로 여겨지겠지만 그럼에도 그 차이는 무엇인가 궁금해진다.

최근에 읽은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책에서 17세기 이후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에 힘입어 증가한 인쇄물이 인류에게 끼치는 영향을 보면 삶은 풍요로워지는 반면 점점 정신세계는 이전보다 되려 후퇴한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보여준다.

그래서 요즘 많은 사상가들은 인류 역사상 모든 면에서 가장 풍족한 이 시기가 인류가 퇴보하는 분기점이 아닌가라는 역설적인 평도 한다.

신앙의 세계도 마찬가지여서 말씀은 넘쳐나고 아멘의 소리는 전세계의 교회마다 커져만 가지만 정작 본질은 없고 껍데기만 남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현실화되는 것 같다. 우리나라만 봐도 불과 십수년전까지만 해도 교회는 사회를 받쳐주는 든든한 반석같았지만 지금은 기둥은 낡고 낡아 뭔가로 대체되어야 할 것 같은 위기 상황에 있다. 우리만의 문제는 아닌 것은 앞서 말한 내면은 텅 비어가는 인류의 현재 상황과 맞물려 전 세계적인 현상인 듯도 하다.

나의 생각은 없고 정리되지 않고, 쌓여있지도 않고, 되새김할 것이 없어 결국 말씀은 넘쳐나나 속에서 수용하지 못해 그냥 배설되어 버리는 것이다. 대체 이러한 상황은 어떻게 개선될 수 있을까? 생각없는 사람들을 다시 생각하는 존재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할까?




 



 

 http://www.cine21.com/movie/info/movie_id/40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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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아기가 뒤바뀐 줄도 모르고 수년간 기른 부모들.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그 아기들을 고의적으로 바꾼 간호사. 영화 중간 료타(케이타의 아버지)는 그 간호사를 찾아가 '당신때문에 우리 가정은 엉망진창이 됐어' 라고 한다.


재앙이다. 

단순한 병원의 실수였다하더라도 큰 일인데, 알고 보니 고의적인 일이었다니. 게다가 이젠 그 시효 기간도 경과해버려서 처벌도 안된다라... 영화를 보면서 저걸 어째 야 하나 싶었다. 법이 문제네 어쩌네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최근 읽은 필립 얀시의 '하나님 제게 왜 이러세요'라는 책이 떠올려진다.


미국에 있었던 여러 총기사고 중 가장 나이 어린 초등학생들이 희생된 샌디훅 초등학교 사건을 중심으로 대체 왜 이런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는가에 대해 하나님은 대체 그 때 무얼하고 계시는가에 대한 물음에 대한 책이다. 이 일만 아니라 사라예보, 일본 후쿠시마 등등의 많은 인재, 자연재해 가운데 벌어진 무고한 희생에 대한 근원적 물음이 이어진다.

최근에 우리에게도 세월호 사고로 많은 귀한 생명을 잃었다. 더욱이 이는 단순한 사고가 아닌 사회구조적인 문제의 총합이 사고로 터진 터라 대체 이걸 누구에게 모든 책임을 물어야 하는 가에 대해 우리나라는 혼란 가운데 있다.

필립 얀시의 책을 보면서 그런 처참한 현실 가운데 전능자는 개입하시지 않고 뒷짐만 지고 계시는 듯 하고, 범죄를 저지를 이들은 호위호식하면서 너무나도 잘 살고 있는 상황이라면 '대체 여러분은 어쩌겠는가' 라는 물음이 이어졌다. 그렇다고 그들을 하나하나 찾아가서 복수라도 하면 지금의 문제가 갑자기 원래의 행복했던 상태로 돌아가는가? 그나마 범죄자가 있으면 그렇기라도 하겠지만 자연재해는 또 어째야 하나? 대체 누구에게 그 문제의 책임을 지운단 말인가?


다시 영화로 돌아가서 료타는 이 문제에 대해 잘못을 한 병원, 범죄를 저지른 간호사, 실제 자기 자식 류세이를 기르고 있는 부모의 궁색한 모습, 지금의 자신의 모습같은 아버지 등등에게 그 책임을 지우려는 듯 하다. 똑바로 살아왔다고 여겼고 그리고 그 만큼 이루었으며 그래서 지금의 상태를 그대로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었는데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앞으로의 일도 어찌해야 할 지 앞길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상황에서 대체 어쩌라는 말인가?

논리적으로 따지면 원인들의 문제점을 해결하면 결과는 정확하거나 선한 결과가 나옴이 당연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게다가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를 어찌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제도를 개선하거나 법에 의한 처벌같은 인위적인 방법으로는 이미 헝클어져버린 삶의 문제를 바로잡아줄 어찌할 방법이 없다.

영화에서는 아이를 맞바꾼 가정이 서로의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여 알콩달콩 잘 살게 되었다 이런 결과를 말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문제를 던져준 이들을 단죄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와 아픔을 자신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자기를 닮지 않아 실망스럽기만 했던 남의 아이를 다시 가족으로 감싸안는 것으로 끝낸다. 삶의 문제를 해결해야할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문제 그대로 삶속으로 끌여들여 녹이는 것으로.


필립 얀시도 하나님에 대해 동일하게 말한다. 샌디훅 사건의 부모들, 사라예보의 시민들, 후쿠시마의 희생자 가족들 가운데 하나님은 문제 가운데 상처받고 피 흘리는 그들 가운데서 함께 계시고 그들을 위로하고, 다독이고, 감싸안으셨다. 물론 그 하나님이 형체를 띄어 나타난 것은 아니다. 크리스챤이라 불리우는 이들을 통해서도, 또 교회의 이름으로도, 여러 모양으로 아픔 가운데서 움직이신다.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상처가 완전히 해결되고 아무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아픔은 그대로 기억되고 남아 있지만, 오히려 그 상처들로 인해서 서로를 다시 감싸고 안아주는 지렛대가 된다. 


여러 모양으로 고통을 겪는 이웃들이 있다. 세월호, 군폭력의 희생자... 많은 부모, 가족들이 힘들어하고 슬퍼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어떻게 그들을 대하고 있나? 아니 스케일을 좁혀서 내 아이들, 내 아내에게는 나는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가? 료타의 모습을 보면서 억지스런 웃음을 짓느라 힘들어하지 말고 힘 빼고 자연스럽게 삶을 대하라는 메시지를 봤다.


PS : 아역배우들이 너무 귀엽다. 특히 막내 야마토의 능청스러움은 내 둘째를 떠올린다. 그리고 일본의 배우들이 한국의 배우를 닮은건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계속 궁금했다.



TistoryM에서 작성됨




에볼라 바이러스의 확산 기사를 보다가, 한 동안 미뤄놨던 ‘감기(2013)’라는 영화를 보게 됐다.

단순한 재난영화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사회고발 영화였다. 우리나라에 총체적으로 쌓여있는 부조리, 특히 관료이기주의, 지역이기주의의 총합이었다. 그리고 그 중 백미는 자신들의 표만 생각하는 썩을대로 썩은(실제로도) 정치가들.

다만 그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사안을 복잡하지 않게 접근하는 대통령의 모습에서 우리가 바라는 대통령의 모습을 봤다. 그리고 대통령의 결정에 반대하는 총리의 모습에서도 비록 그 결정이 어찌되었던 우리가 바라는 책임있는 총리의 것이었다는 점에서 언제까지 우리는 이걸 이상향으로만 바라봐야하는지 안타까웠다. 식물총리, 꼭두각시 총리 이런거 언제쯤 걷어치우나?

아무튼 이번 에볼라는 숙주(바이러스가 기생하는 유기체)가 너무 빨리 죽어 바이러스의 급속적인 확산에는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어서 영화에서처럼 대판데믹을 일으킬 것 같지는 않지만, 만에 하나 지금과 같은 에볼라가 아닌 공기전파를 통한 에볼라일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다행히 지금 것은 그 유형은 아닌 듯 하다. 그러나 예전에 공기전파 에볼라도 발견된 적도 있으니…(이건 원숭이끼리만 감염되던 거라)





오랜만에 읽은 제대로 된 신앙서적인 듯 하다. 물론 이 책은 어떤 간증이나 체험을 서술한 책은 아니다.


C.S.루이스와 같이 매우 논리적으로 기독교를 변론하는 책이다. 루이스가 시대를 초월하며 서술했던 걸 보면서 대단하다 여겼다. 하지만 아무래도 시대적 흐름을 반영하지 못하는 것도 있다 싶었는데, 이 책은 최근에 저작된 책이니 현 시대의 이슈를 상당 부분 포함하고 있어 추천할 만 하다. 


과학의 발달과 사회의 발전에 따른 현상의 변화는 하루가 다르게 달라진다. 그에 따라 사람들의 생각도 시시각각 변한다. 가치관도 덩달아 끌려간다. 마치 목에 칼을 들이댄 강도에게 납치되듯. 진리는 매일 매일 물건 만들 듯 새롭게 쓰여지는 듯 하지만, 세상의 혼란은 그에 비례, 아니 제곱에 비례하는 듯 하다.


그럼에도 진리는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수호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히 아는 것. 그것만으로도 삶은 대변혁을 겪게 된다. 


그런 면에서 요즈음의 삶을 통해 깊은 회의감과 실망을 겪는 신앙의 동지들이 있다면 꼭 읽어보시길 바란다. 물론 중간중간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부분도 있긴 하지만, 크게 궤를 벗어나는 건 아니어서 무방함.



최근 '스탈린그라드 전투' 관련 책을 읽다 너무 와닿는 부분이 있어서 페이스북에 스크랩.

저중에서 히틀러를 누군가로, 스탈린그라드라는 배경을 세월호로 바꾸어놓고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인간의 삶은 바뀌는게 없나 싶기도 합니다.

물론 저 근간에는 나약하기만 한 인간의 한계가 있는 것을 알아야 하죠. 그래서 오히려 절대자를 추구하게 되구요.



스탈린그라드 VS. 세월호

2014. 7. 3. 오전 11:12:59

많은 역사가들은 또한 제6군의 거의 모든 장교가 소련군의 포위망을 돌파하려는 시도가 즉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인상을 심어 주었다. 
하지만 사실이 그렇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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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들, 특히 벙커를 파고들어 가 있는 병사들은 진지와 중화기들을 포기한 채 "눈밭으로 나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들판에서 소련군의 공격을 받을 게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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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텨라! 총통이 우리를 구해 줄 것이다!"
이 구호는 매우 효과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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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위 지역 내의 병사들은 "버텨라!"고 하는 구호를 굳은 약속처럼 믿었고, 많은 장교들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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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히틀러를 믿어. 그는 자신이 말한 대로 할 거야. 자신의 말을 지킬 거라구." 






여지껏 보려다 자막 등의 소소한 문제로 미뤄놨던 ‘타인의 삶’을 보게 됐다.

시끌벅적하고 화려한 영화들도 재밌지만, 적막감이 흐르고 어찌보면 영화관에 부족한 수면을 취하게 해줄 수 있을 정도로 잔잔하게 흐르는 전개다. 그렇지만 치밀함으로 대표 되는 독일의 영화라서 그런가, 아니면 배우들의 탁월한 연기 때문인지 1분도 지루하지 않게 흡수되어 본 듯 하다.

특히 ‘비즐러’ 대위를 연기한 배우는 그 눈빛이며 행동 하나하나가 빨려 들어가는 듯 했다. 그리고 작가 ‘드라이만’과 아내역 ‘크리스타’의 연기 또한 탁월했다.

냉전 시절 장벽 하나를 사이로 분단된 동독의 슈나지(우리로 치면 국정원)의 요원인 주인공이 작가 부부의 삶을 엿들으며 반평생 살아온 자신이 속해있는 시스템에 대한 의문을 점차 가지게 되고 오히려 그들에게 동화된다는 내용이다.

극 중, 주인공 비즐러 대위는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만난 유치원 꼬마로부터 자신이 속한 조직에 대한 비난을 듣는다. 평소와 같으면 당장 그 아이의 이름을 묻고 부모를 잡아 들이겠지만, 이미 그 비난에 대해 답을 잃게 된 그는 아이의 이름을 물으려다 그만둔다.



내용을 보면 주인공의 앞날이 순탄치 않을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되지만, 그렇다고 그렇게 단순히 끝낸다면 영화가 아닐 터. 그렇게 우여곡절의 시기가 지나고 몇 년 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역사적 사건 또한 지난다.

독일 통일 후 구동독 주민들이 삶의 수단을 제대로 구하지 못해 힘들어한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어왔다. 특히 하위 말단 들일수록. 게다가 비즐러 대위처럼 자신의 조직으로부터 밀려나 잊혀져 있는 경우라면 더더욱.

그렇지만 그 체제로부터 핍박 받고 힘들어하던 이들, 드라이만과 같은 이들은 그 세월을 견더낸 대가를 얻게 된다. 하지만 동독의 체제에서 자신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에 대해 늘 궁금해 하던 그는 우연히 비즐러 대위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가 있어 지금의 드라이만이 있었음을 알고 그에게 어떤 방법으로 감사함을 전하게 된다. 그 방법은 직접 영화를 보시길.



영화 보는 내내 울적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 결국 그렇게 끝날까라는 의문도 들었는데 영화의 마지막에선 약간의 보답을 해준다.

좋은 영화다. 예전에 들었던 평이 괜한 것이 아니었음을 확인했다. 다른 이들도 봤으면 좋겠고. 또 보면서 마음 한견에 드는 생각은 시절과 체제, 그리고 다루는 방법을 제외하곤 우리 시대와 다른 게 뭔가라는 물음이 든다. 안타깝다.



최근에 읽고 있는 ‘갈리아 전쟁기



카이사르야 두말할 필요 없는 세기의 영웅이라 칭송되니 책의 내용은 흥미롭기 그지없다. 게다가 그가 직접 썼다. 대단하지 않은가? ^^ 전략가의 카이사르, 정치가로서의 카이사르의 모습이 생생하게 전해진다. 초등학생 시절 읽었던 위인전 속 정형적인 위인의 모습에서 훨씬 생동감 있는 시이저의 모습을 볼 수 있어 좋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계속 드는 의문이 있었다. 피정복민의 입장이 상당히 궁금해진 것이다. 특히나 요 며칠 사이의 우리나라에서 총리후보로 지명된 분의 언사를 통해 느끼는 바가 크게 다가온다.

여지껏 카이사르의 명성에 따라 로마 시대의 영토 정복과 통치는 하나의 로망처럼, 특히 제국을 꿈꾸는 나라에게는 최고의 고전처럼 다뤄졌다. 그리고 우리 또한 일제 36년을 거친 우리나라의 입장이 어찌 보면 그 갈리아 지역의 당시 부족과 비슷한 처지였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카이사르의 활약에 열광해 왔다.


갈리아 지방(지금의 서구유럽 중 라인강 서쪽, 프랑스가 상당부분)을 다 년 간에 걸쳐 대부분 평정해버린 카이사르가 아무리 공정한 통치를 하려고 했다고 하더라도 여지껏 살아온 토착민들, 특히 상당 기간 한 곳에서 부족을 형성해 살아온 이들에게 카이사르는 낯선 이방인일 뿐이고 침략자일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틈만 나면 반란(갈리아인 입장에서는 독립전쟁)을 일으킨다. 

갈리아 전쟁기의 저자인 카이사르의 입장에서야 귀찮은 날파리들이 소등을 간지럽히는 것밖에는 안됐다 하지만, 그 날파리의 입장에선 정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이다. 무엇 때문에? 자기들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했기 때문이다.  갈리아 뿐만 아니라 라인강 동쪽의 게르만족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물론 당시엔 갈리아인과 게르만인간의 다툼도 만만찮았지만 여하튼 그들또한 게르만 특유(의외로 매우 금욕적)의 정체성과 삶의 터전을 지키려고 했다. 재밌는 건 갈리아 지방은 귀족, 평민의 계급이 구분이 명확해서 되려 평민의 입장에선 카이사르의 통치가 더 반가웠을 수도 있다. 물론 그와는 정반대로 서로의 계급을 따지지 않고 평등한 사회를 이루며 살던 게르만 민족에게 카이사르는 거의 재앙이라고나 해야할 수준이다.

시이저에게 자식을 볼모로 잡히고, 영토를 뺏기고, 심지어는 반란의 죄로 자신의 목이 잘리는 심각한 상처를 입고도 계속 반란의 씨를 이어간 걸 보면, 한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한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고대도 지금과 다르지 않았음을 새삼 알게 된다.

물론 지금에 와서야 보면, 당시 로마의 통치로 인해 갈리아 및 여러 지역(영국 포함)의 교류가 더 활발해지고 문명의 투입으로 예전에 비해 더 풍요로워지는 계기가 됐음은 그 세대와는 전혀 연관이 없는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쉽게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얼마 되지도 않은 기껏해야 일 백 여년 전 우리의 땅에서 제 땅을 잃은 선배들이 자신의 주권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독립 운동을 하고 고생을 했던 것을 그 상황을 단지 결과(산업화, 교양수준의 상승 등)만을 주목하여 그 고난은 별 것 아닌 것처럼, 또 그 많은 희생을 통해서 얻은 것임에도 앞서 말한 얻었다고 여겨지는 그것을 위한 과정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단정하는 것은 해도 해도 너무한 발언이다. 마치 유체이탈 화법의 대가라 불리우는 누군가의 모습처럼 말이다. 설령 그 세계관이 일부 긍정적인 면이 있었다고 한들 그 말은 아직도 일제로부터 고통 받은 이들이 여전히 생존해 있고 그 혈흔들이 짙게 깔려있는 이 세대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발언이다. 또한 몇 수 십 세대가 지나더라도 변하지 않을테다. 임진왜란을 두고 우리민족을 부정하는 것이 가당하기나 한 가? 그런데 온라인의 글 중엔 정말 그렇게 우리 민족의 영웅인 이순신을 폄하하는 내용도 있는 모양이더라. 대체 그 머리 속은 어떻게 구성됐을 지 궁금해진다. 으….

링크한 위키의 내용을 보면 ‘암비오릭스’라는 인물이 있다. 카이사르 시절 로마군 최악의 패배를 안긴 악당이다. 우리로 치면 ‘김좌진 장군, 안중근 의사’ 정도랄까? 영웅이다. 비록 수 천 년이 지났지만 벨기에 인들에게는 한동안 잊혀져 있다가 새롭게 조명받으며 영웅으로 칭송 받는다. 일부(?) 몰지각한 식민 사관 또는 수꼴의 입장에서 보면 안중근, 김구, 윤봉창 등은 날파리와 같은 존재일 테다. 그런데 잘 보시길. 일본이 그렇게 닮고 싶어하는 서구 유럽인들은 비록 수 천 년이 지났지만 다시금 그들의 영웅이 누구였는지, 그들의 정체성이라는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 지를 저렇게 보여주고 있다.  




300 - rise of an empire



예전에 살라미스 해전에 대한 책을 읽었다. 오늘 ‘300’을 보니 그 책이 기억났다. 물론 오늘 본 ‘300’과는 매우 거리가 있는 내용. 300의 1편도 그랬지만, 등장인물의 허구도 많고, 특히 ‘크세르크세스’는 성서의 인물과도 많이 다르고 무엇보다도 역사상의 인물과도 차이가 있다. 그러나 그것 가지고 뭐라는 사람은 얼마 되지도 않고 그래봐야 웃음거리밖에 안된다. 영화는 영화일 뿐. 다만 그 역사적 배경에 대한 배경과 결과정도만 일치할 뿐이다. 그리고 첨가한다면 그 의미 정도랄까?

‘노아’ 라는 영화도 그런 방식으로 바라봐야 할 듯 한데, 아직도 상당수 교회에서는 아예 ‘이단시’ 하나 보다. 영화 자체가 이단이 되다니? 한국 교계의 영역 확장에 놀랄 뿐이다. 이유는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문화가 정신을 지배한다고 하니, 그 말이 틀린 것이라고 만 할 수 없지만 재미를 추구하는 영화에서 그 정도 만이라도 한 게 어딘가 싶다. 직접 영화를 보면서도 몇몇 장면에서 교회서 시비가 걸리겠다 싶었지만, 그래도 신의 공의와 사랑에 대해 잘 표현했다는 생각이었는데, 그런 건 아예 관심도 없나 보다. 오직 형식 만을 가지고 뭐라는 꼴.
그럴 것 같으면 300의 크세르크세스도 성경과 맞지 않게 잘못 표현했으니 뭐라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물론 나의 억지 주장이긴 하다만. ;

아무튼 성도들의 수준을 그렇게도 못 믿는 건가? 하긴 제대로 된 성도라고 부를만한 이가 얼마나 될까? 물론 그런 판단을 감히 인간이 한다는 건 더더욱 어리석은 일일테니 더 긴 이야기는 쓸모없는 논쟁거리만 낳을것이고… 하여간 어제 나이 드신 권사님의 난데없는 영화 ‘노아’에 대한 이단 이야기에 한숨만 나온다.

그나저나 '몽상가(The Dreamers, 2003)'의 에바그린은 왜 그리도 얼굴이 헬쑥해졌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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