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곧 캐나다로 유학 가는 동생 내외랑 식사하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유아용 카시트에 대한 것이었는데요.
내용인 즉, 공항에 내려서 숙소든 어디든 자가 차량을 이용하여 이동 시에는 반드시 카시트를 장착한 후 아이를 탑승 시켜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방금 낯선 이국 땅에 도착한 유학생 가족이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을 겨를도 없었을 터인데도, 걸리면 벌금, 이동 중에 재차 걸리면 또 벌금이랍니다. 상황을 고려함 이런 것도 없답니다. 게다가 설령 카시트를 미리 준비해간 주도면밀한(?) 부모들도 그 카시트가 캐나다에서 인증하는 제품이 아니라면 역시 벌금. 벌금….
결국 출발 전엔 반드시 캐나다 인증 카시트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만약의 사고가 생기더라도 보험의 적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처음엔 무슨 저런 융통성 없는… 이런 생각이 들다 문득 세월호가 생각 났습니다. 그러면서 동생이 하던 말, ‘절대 캐나다에서는 세월호 사고는 일어나지 않을 거야.’
우리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공무원인 저를 대입해서 생각해봤죠. 양쪽(부모, 단속 공무원)의 입장 모두 말입니다.
아마도 부모였다면 봐 달라고 하고 안 들어주면 화내고, 억지 부리고 해서 처음이니 봐주기를 원해 넘어갔을 수도 있습니다. 한편 단속 공무원이었다면, 처음엔 벌금 받을 수도 있겠지만(거기까지 단속 했을까라는 의문도 들고), 재차 걸렸을 때는 나름 ‘유도리’라는 것을 들고 봐주고 넘어갈 지도 모릅니다.
한국적 정서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는 것에 동의하시는 분 많을 겁니다. 화내고 억지 부려서 금액 줄이고, ‘이후에 꼭 답니다’ 이러고 지났을 수도 있고, 공무원은 ‘다음에 꼭 다셔야 해요’라고 나름 인정을 베풀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일이 있었으므로 부모는 이후에 꼭 카시트를 달기는 했겠죠.
결국 카시트는 달았고, 공무원은 어느 정도 단속의 효과는 거두었으므로 결과적으로는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렇지만 앞서 말한 ‘만약의 경우’가 문제입니다.
‘만약의 경우’
이걸 무슨 수로 예측할 수 있겠습니까? 캐나다에서 체류하는 기간이 수년인데 방금 도착해서 몇 시간 이동하는 게 그 기간 중에 얼마나 차지하겠습니까? 그 기간에 대한 비중이 너무도 적기에 그 정도는 감수하자 이렇게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지 않을까요?
그렇지만 ‘만약’이라는 것은 그런 일반적인 통계나 확률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1%의 사고 확률도 사고 그 자체로 봤을 때는 무시해서는 안되니까요. 우리는 통계 또는 확률이라는 것의 허점에 너무 쉽게 적응되어 있습니다. 비교적 낮은 쪽에 분포하는 확률값을 무시하고 지내는 것에 익숙해진 것입니다.
바로 그 부분을 캐나다 같은 나라에서는 무시하지 않고 철저히 적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경우를 두고 고속 성장한 한국의 상황에 빗대어 그랬느니 어쩌니 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여지껏 살면서 다수의 입장, 높은 확률 또는 통계분포의 자료에 집중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소수의 입장, 그다지 높지 않은 가능성, 주변의 자료는 거의 무시하고 말이죠. 그 정도는 감내하고, 아니면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래서는 안되는 시절이 온 것 같습니다. 꼭 이런 사건, 사고가 일어나서 만이 아니라 환경 자체가 그럴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라는 것이죠.
물리학에서도 이론을 정립하기 위해서 기본 환경을 단순화시키는 방법으로 한 차원 아래의 변수는 가능한 무시하는 게 많습니다. 물론 그렇게 해서 세워진 이론은 많은 부분에 있어 잘 적용되어 왔습니다. 그렇지만 최근의 경황을 보면 그렇게 무시된 변수들이 누적되면서 발생하는 오차가 심각한 경우들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오류를 잡고 더 정확한 계산이나 예측을 위해서는 그러한 미시적인 자료들도 고려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죠.
과거에는 딱 하나의 상황에 단순한 주변 상황, 그리고 하나만의 결과만을 주로 다루니 계산도 예측도 어려울 게 없었지만, 문명이 발전하면서 점점 그럴 수 없는 세상이 되어 가는 겁니다. 도로에 다니는 차가 몇 대 없었던 시절이라면 카시트가 그렇게 까지는 필요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1가구 1차량의 시대를 넘어 1인 1차량의 시대가 되어가는 시점에 사고의 확률은 그만큼 커지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확률에 대한 인식이 예전의 기준에 자리 잡고 세월의 흐름을 따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것을 정확한 인식하는 것은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에게는 말처럼 간단한 게 아닙니다. 제가 보기엔 일반인들도 이런 상황의 흐름을 어느 정도는 인지할 필요성이 있지만, 더 중요한 건 이러한 흐름을 더 정확히 바라보고 주도할 수 있는 이들을 신뢰하고 따라갈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 사회는 큰 잡음 없이 순조롭게 유지되지 않을까 싶군요.
하지만 앞서 말한 그런 벌금 체계를 우리나라에 당장 적용하면 굳이 이유를 자세히 안 봐도 그냥 ‘난리’ 납니다. 그 배경을 믿고 따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시스템을 도입한 것에 대한 신뢰, 한국인에게는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 ‘신뢰하지 못함’을 리더계층은 믿지 못하는 이들을 탓합니다. 미개해서, 무식해서라고 말이죠. 빅데이터가 언급되는 현대 문명사회에서 일반인은 그 사회가 제공하는 서비스에 별다른 코멘트를 달고 분석하고 이를 비판할 겨를이나 정보분석의 수준이 안됩니다. 그냥 따라갈 밖에요(미개하긴 하군요 -,.-;). 그나마 시민단체나 진보적 단체의 언급이 있지만 이미 사회는 정보의 흐름을 쥐고 있는 자들의 손에 넘어가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국민의 수준이 어찌 되었든지 그 핵심을 쥐고 있는 자들의 의식수준이 바로 그 나라의 수준을 가늠하는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리더십들은 여전히 일반 개개인을 탓합니다. 믿고 따라오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현대문명은 시민사회를 거쳐, 대중사회로 넘어오면서 주도권을 대다수의 국민이 잡는 듯 했지만, 안타깝게도 여전히 핵심은 소수 리더계층에게 있습니다. 결국 무엇이 되었든 리더가 대다수 국민과의 신뢰관계 속에 이끌지 않는다면 결코 순탄한 항해를 할 수 없을 겁니다.
카시트를 이야기하다 이야기가 장황해졌지만, 그런 벌금 시스템을 만들 수 있는 조직과 이를 철저히 이행하는 집행자들, 그리고 그것의 근본취지를 이해하고 신뢰하는 사회구성원의 모습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니 우리도 언젠가는 저 모습으로 가겠거니 하는 막연한 기대감에 끄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