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이 지경이 된 이유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개인적인 견해로는 두 가지.
1. 신사참배에 대한 트라우마
일제강점시기에 신사에 대한 참배를 교회 대다수가 참여하면서 광복 이후 그 부끄러운 행위에 대한 교회의 잠재의식에 자리잡은 외상후 또는 이른바 트라우마.
이러다 보니 코로나 시국에서 방역을 위한 명단 제출 등을 거대권력에 대한 굴종으로 보고 처벌을 불사하며 제출을 거부하는 것은 저 기저의식에 깔려있는 신사참배라는 트라우마 때문 아닐까? 현 정부를 적그리스도, 악의 세력으로 인식하는 상당수의 교회라면 더더욱.
2. 목사 양산 시대
그럼 이런 어처구니 없는 잘못된 인식에 대해 그것도 일반 교인들까지 이런 비상식적인 이해를 하고 있는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교회의 유일한 해결책은 이끄는 목사의 능력인데, 글쎼다. 질과 양 중에서 양만을 중시하여 능력과 자질이 수준 이하인 아니, 당초에는 멀쩡했을지라도 최종 결과물은 왜곡된 현실인식을 하는 목회자들이 양산됐다.
그런데 왜 꼭 목사만일까?
목사만이 하늘과 땅을 잇는 유일한 통로라는 구약시대 제사장의 권위를 신약시대에도 그대로 적용하는 몰이해. 그래서 오로지 목사 만이 중요한, 평신도는 그냥 따라만 와라는 기이한 형태를 가진 한국만의 목회자 산업이 탄생된 데 기인하는 것으로 본다.
독일도 나치독일 시절 본 회퍼 목사같은 분 덕에 종전 후 그들의 신앙을 되짚어 보고 진정한 참회를 이끌어냈다고 본다.
우리나라도 그에 못지 않은 주기철 목사, 손양원 목사같은 분들이 있음에도 광복 이후 교회는 신사참배에 대한 트라우마를 이 분들 이름을 들먹이는 것만으로 대충 넘어가고 이후 권력에 빌붙어 아니 권력의 한가운데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니 지금처럼 광복 이후 뿐만 아니라 수백~수천년간 누려온 기득권에 대한 시대적인 대변혁을 맞이하여 이들과 결탁하여 잘 지내온 교회의 핵심권력들이 움직였다고 여겨진다. 비록 개교회로 흩어져 있는 듯 하지만 같은 이해 가운데 그 들 밑에 깔려있는 수많은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중세 교황처럼 교시하고 세뇌하면서 이 지경에 이른 듯 하다.
'돈, 섹스, 권력'이라는 책이 90년대 초에 두란노서원에서 나와서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교회에 대해 지적한 것이지만 결국 이 마저도 면피용으로 끝난 것 같다. 3종세트를 모두 획득한 채로 말이다.

p.742(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

"오늘날에도 신의 유일성을 왜곡해서 이교도에 대한 배척과 분쟁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그때 역시 신앙을 자신들의 세속적 탐욕에 이용하는 불순한 세력(성직자, 정치가 ,상인)이 선동해서 저지른 반그리스도적이고 반신앙적인 만행이었지요. 우리는 여기서 “최선의 것의 부패는 최악이다(Corruptio optimi pessima)”라는 오랜 격언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십자군을 일으키며 “신의 뜻이시다(Deus Le Volt)”라는 구호로 민중을 선동했던 중세 성직자들이 그랬듯이, 신을 왜곡하여 빌미로 삼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가장 쉬운 선동 방법이지만 가장 나쁜 방법이기도 하지요."

중세에만 존재하는 십자군이 아니다.
현 시대에도 존재했던 아니 지금도 존재하는 십알단이 있고 신천지가 있다.

성직자 -교회 총회, 전광훈 같은..
정치가 - 음... 요즘 핑ㅋ당?
상인 - 순실전자

이런 커넥션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 퍼져 있을테다.

https://m.clien.net/service/board/lecture/14707167?od=T31&po=0&category=&groupCd=allreview

매번 클리앙의 글만 퍼오기는 하지만 이 시대를 사는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생각해봐야 할 주제라고 여기는지라.

핵심은 종교는 현세대의 기준으로는 비합리적인게 맞고 그걸 인정할 수 있어야하는데 많은 교인들은 비합리적(사실의 문제)=BAD(선악의문제) 이런 범주의 오류에 빠져 있다는 것. 그래서 이걸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

어릴 때 교회를 통해 회개와 구원에 대한 믿음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칼 세이건의 'COSMOS'를 다섯번 이상 탐독하면서 신앙과 과학에 대한 견해를 나름 가지고 있었던 터라 종종 교회 안에서 창조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그냥 듣고 있자면 논쟁거리로 갈 것 같아 그냥 입다물고 있는 경우도 있고 어떨 때는 이단아처럼 대해질 때도 있지만 어쩌겠나?

생각이란게, 내 믿음이란 게 뇌 속의 사고과정, 그것도 양자수준의 세계에서 임의로 결정되다보니(될 것이라고 요즘의 뇌과학에서는 설명하는 것 같다) 어린 그 시절 머릿속의 어떤 결정으로 인해 여지껏 이르렀는데 그걸 어떻게 바꾸나? 이걸 설명하고자 하면 꽤나 긴 글이나 시간이 필요할테니 생략하고.

아무튼 그나마 나름대로는 신의 존재에 대해 의심이 없는 것 하나로 여지껏 버티고 있는 것이다만 요즘의 교회 꼬락서니 보고 있자면 회의도 많이 들지만 바울사도를 통한 성경 말씀에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지. 희망이 있고 건전한 교회도 많다.



I have faith in God.
나는 신을 믿는다.

I believe in friend.
나는 내 친구를 믿는다.

믿음, 신뢰? trust? faith? belief?

과연 믿음은 무엇일까? 아니 기독교인, 크리스챤에게 믿음은 뭘까?
지금 부적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송을 보면서 저들이 말하는 믿음은 생사화복을 중심으로 그것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하지만, 과연 예수를 구원자로 믿는 나, 또는 우리는 무엇이 믿는 것인가라는 물음을 다시 묻게 된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이지 생사화복을 잘 지켜 줄 것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
친구를 좋아하고 의지하니 믿는 것이지, 그가 나에게 베풀 것을 기대하고 믿는 것이 아니니까.

믿음이 간다 이런 말을 할 때 상대의 말과 행동이 일치할 때 사용하곤 한다.

말.

서로의 생각을 알려고 하면, 소통이 있어야 한다. 오고 가는 대화나 문장 속에서 상대의 생각을 알게 되고 나와 같은 점은 기뻐하고 다른 것이 있다면 더 깊은 대화를 통해 이해하거나 일치하거나, 아니면 그냥 인정하게 되던지.
또한 행동함으로 그 이해와 신뢰의 수준을 깊게 하는 것.
그래서 상대의 어렵거나 이해 못 할 상황에서도 기다려주고 헤아려주게 되는 것.
그 간에 쌓여가는 많은 작은 역사들, 히스토리.

그런데 지금의 신앙의 수준은 부적과 같아서 믿음의 주체인 나와 상대의 이야기가 아닌 그 결과물에만 주목하는 것이다.
만약 그 부적이 아무런 효험도 없었다면(내 생각에는 통계와 확률의 범주지만) 과연 방송에 나와 기쁨을 보여주고 무한한 신뢰를 보여줬을까?
많은 교회에서 회중기도, 새벽기도, 대표기도, 개인기도 중에 개인의 생사화복에 대한 간구로 넘쳐난다.
나와 하나님 간의 깊은 관계, 신뢰, 소통이 있다면 과연 그 초점이 저런 것에만 맞춰지게 될까?

이 글을 끄적이는 처음에는 부적과 믿음의 차이가 뭔가라고 하려했는데 쓰다보니 이 시점에 그간 성경을 멀리 하고 있던 나에게도 새로운 목적이 생긴다.
한 동안 왜 성경을 읽어야 하는가 하는 회의감이 들었었다.
주변에 보이는 성경통독, 성경백독, 성경필사 등등… 너무도 많은, 알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성경에 대한 행사들은 나같은 이들에게 되려 거부반응만 일으켜왔음을 고백한다. 성경을 백독했더니 병이 나았어요, 축복이 넘쳐요 등등. 그래서 대체 저 모습이 부적과 다를 게 뭔가라는 등등의 생각들.

물론 그 과정 속에 진정으로 하나님과의 대화의 장에 빠진 분들도 있겠다. 그래서 그런 노력과 수고를 폄하하고만 싶지는 않다. 그렇지만 마치 그것만이 목적인양 진리인양 나팔처럼 불어대는 소음이 너무 많아서 피로했다.

하지만 친구는, 신뢰하는 이는 서로 대화한다. 소통한다. 그것은 말이고 대화다.
하나님은 나에게 어떻게 소통하시는가? 성경 아니겠는가?

성경 아니라도 이 세상이 그 분의 존재를 알려주지 않는가라는 생각도 했었다. 굳이 성경 자주 안봐도 세상에 뿌려져 있는 하나님의 흔적만 봐도 은혜롭지 않은가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믿는 이가 멀리 있을 때 그를 그리워하며 그의 흔적을 통해 그를 기억하는 것도 있지만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한계가 있다. 그래서 간간히 편지도 하고 전화도 하고 여차하면 어디선가 만나서 서로의 안부를 묻기도 하는 것 아닐까? 그런데 나에게는 그 분이 남겨놓은 글들이 몇천년 동안 보존되며 여지껏 펼쳐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성경을 내 옆에 덩그러니 놓고 ‘봐라. 내 말이다. 쓸쓸해하지 말고 외로워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고 내 말이니까 늘 두고 봐, 곧 올게’라고 하시는데 이제 안 볼 수 있나?

라고 이렇게 끄적여놨는데 과연 1년 쯤 뒤에 나는 어디 즈음에 있을까? 그래서 주변에서 나를 체크해 줄 필요를 느낌. ㅎㅎ

참고 : http://ssje.org/ssje/2013/04/07/what-it-means-to-have-faith-in-god-br-david-vryhof/



2014년 7월 6일 주일 낮 설교는 미리 예고된(?)대로 담임목사님이 관련 서적을 내시면서 '복'에 대해 얻은 인사이트를 나누는 자리였다.

개인적으로는 참 좋은 말씀이었다고 생각했고 예배 중에도 그랬다. 다만 들으면서도 한가지 마음 한구석에 자꾸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설교의 주제는 '복'이란 무엇이며 여기에 대한 성도의 자세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내용이었다.
사실 최근 들어 한국교회의 기복신앙에 대한 터부시는 심각하다 못해 되려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마져도 손사래치는 이상한 형국이었다. “기복"이라는 단어 속에 하필 복이라는 blessing이 자리잡고 있다보니 왠지 복이라는 단어만 나와도 신앙의 수준이 낮은 듯한 선입견을 주게 된 것은 사실이다.

  • 복 : 히브리어 바라크(Barak) -
    1.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것.
    2. 좋은 말을 하는 것.(하나님께는 찬양, 사람에게는 칭찬)

그런 상황에서 목사님의 설교는 참 시의 적절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하고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한마디로 '복'은 여지껏 많은 이들의 머릿속의 부귀영화 이런 게 아닌 '하나님' 그 자체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그것이 바로 복이다. 참 은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계속 걸리는 부분은 복에 대한 정의를 내놓으신 것에 대한 성도의 자세였다.

좀 불편하게 다가온 부분은 두번째 '좋은 말'과 관련해서였다.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게 아니라, 저 말씀을 과연 성도들이 어떻게 적용할까 하는 우려가 생겨서였다.

과연 '좋은 말'이란 무엇일까? 이 부분은 목사님이 깊게 설명해 주시지 않았다. 다만 이후 나올 책에서 다뤄지기는 하겠지만 어제의 설교중에서는 부족해 내 오해가 있을지도 모른다.

목사님의 설교대로라면 성도는 비판의 말, 정죄의 말은 절대로 해선 안된다. 물론 악의적인 의도가 있다면 당연히 그런 비판은 정말 지양해야 함은 당연하다. 말 그대로 우리 입에서는 듣기에 선한 말만 나와야 한다. 늘 '잘했어요', 'GOOD', '훌륭해요', 'WONDERFUL', '예뻐요', 'BEAUTIFUL'.

그런데 말씀 도중 목사님이 택시를 탔다가, 우연히 접한 인터넷 방송 속의 비판논조(아마도 야당성향의 인터넷 방송이었나 보다. 나꼼수 같은)를 듣고 그것을 꺼달라고 했다는 부분에서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게 되었다. 물론 목사님 개인적으로는 충분히 그러실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목사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많은 성도들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될까? 상대를 비판하거나 거친 말이 나오게 되면 과연 그들은 복없는 사람들인가? 재수없는 사람들이라서 기피해야만 하고 거부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일까?

'좋은'이라는 말은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귀로 듣기에 좋은 말만이 좋은 말일까?

성경 속에서도 많은 선지자들의 외침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엘리야, 아모스가 눈에 띈다. 간통한 다윗을 고발한 나단 선지자도. 그리고 세례요한이 '독사의 자식들아'와 같은 일갈. 이거 이렇게 적어 놔서 그렇지, 실제 상황에서는 어떻게 들렸을까? 과연 듣기에 좋은 말인가?

그래서 음성적인 것에 더해 그 의도 또한 살펴봐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목적과 방향이 옳다면 듣기에는 좀 거북하고 민망하다더라도 그 또한 좋은 말이지 않을까 싶다. '양약이 입에 쓰다'라는 옛말도 있지 않은가?

이러한 부분이 최근 한국교회에서 수시로 보게 되는 곤란함 아닐까 싶다. 60~70년대 계몽주의의 시대와 같은 시절, 국민을 개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잘 해온(긍정적인 부분이 많았다지만) 교회와 당시부터 지금까지 현역으로 뛰시는 큰 목사님들의 활약은 익히 아는 바다. 이 분들이 특히 강조하는 부분중에 로마서 가운데의 바울사도의 설교, 권세자들에게 머리숙이라 또는 존경하라 등등

그러다보니 정부가 어떤 문제가 있던지간에 대통령은 하나님이 뽑으신 자이니 그에게 협조는 할지언정 비판이나 비난은 하지 말아라라는게 교회를 다니는 많은 이들에게 내려진 사명(?)이다. 최근에 총리파동을 통해 다들 눈으로 확인한 사실은 교회의 장로님이 교회안에서 하신 말씀은 비판이 대상이 아니고 오히려 두둔해야할 일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사실을 이미 확인한 바다.

목사님의 좋은 의도와 설교에 대해 성도는 과연 얼마나 고민하며 심각하게 말씀을 받아들이는 걸까라는 생각이 요즘 많이 든다. 지도자가 실정을 하고 고의적인 문제를 계속 양산하고 있는데도 이를 하나님이 세운 이이니 절대 비판은 사절. 이게 과연 제대로 된 모양일까? 게다가 그 지도자를 하나님이 세웠다는 근거는 뭘까? 물론 성경에 근거하여 하시는 말씀인 줄은 알지만, 그것도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가운데 해석할 것이지 그걸 현대에 가져와서 그냥 문자 그대로 적용해 버리면 곤란하지 않을까?

이 부분에서 한국교회의 많은 목사님들의 외침과 이에 대한 성도들의 화답은 유치원 선생과 원생 수준의 문답으로 되풀이되고 있는 듯 하다. '빨간불에는 무조건 건너면 안되요 알겠죠~? 네~' 뭐 이런거. 바람직한 비판마저도 악한 것으로 한번에 압살시켜버리는 요즘의 모습은 정말 아스트랄하다.

하여간에 한국교회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 중에 하나는 말씀을 받는 이들의 질적 수준 향상이 아닌가 싶다. 제아무리 좋은 설교도 받는 이들이 그에 걸맞는 수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없다고 본다. 그래서 그 선한 의도와는 다르게 일방적인 방향으로만 적용한다던지 하는 것이 요즈음의 한국교회의 위상을 한없이 추락시키는 결과가 된 게 아닌가 싶다.


홍정길 원로목사의 말이 그래서 눈이 간다. 

홍정길 목사 “속지 말라, 멋진 말과 글에”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56445



한 주 용돈이 오천원정도 남길래, 아내에게 '군것질'이나 할 까 하고 의향을 물었더니,
'절기 헌금을 잘 내면 재물복이 많데'라고 저에게 말하면서 헌금내라더군요.

'...재물복이....' , '....재물복이....' -..-;

머리를 한 대 맞은 듯이 멍했습니다. 저도 그렇고 아내도 그렇고 거의 모태신앙이나 다름 없고 학생시절부터 학생회며 청년회, 주일학교 교사에 찬양팀에 아무튼 여러모로 열심히 신앙생활 해왔다고 자부하는 터라 성경말씀도 웬만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죠. 그런데 오늘 아내의 말은 좀 충격이자 어이가 없다라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하나님이 무슨 고리대금업자도 아니고 은행업 하시는 분도 아니고...'

물론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나니~ '라는 성경말씀처럼 타의나 나의 이익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감사의 마음과 헌물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행위라는 것은 너무나 잘 알고 또한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잘 압니다.

그러나 아내의 그 말 한마디는 늘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삶 그자체이다'라고 여겨온 제 신앙과는 정면으로 부딫히는 것이라고 여겨졌습니다. 한마디로 말한마디로 기독교를 기복신앙으로 전락시켜버리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절기헌금과 재물과의 관계를 알아보려고 했지만 성경에 딱 맞는 구절도 없는 듯 하구요. 하여간 제가 아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전 부분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테지만 적어도 하나님이 절간이나 점쟁이집에서나 하는 그런 말을 하는 분이 아닌 것 확실한 마당에 마음이 참 쓰리더군요.

...... ㅜㅜ; 그래도 어쩝니까? 아내가 그래주기를 원하는 것 같아서 오늘 예배 중 헌금 시간에 그 돈 그냥 다 냈습니다. 물론 과거에도 헌금 일이백만원 내는 것이 아깝지도 않았었으니까 액수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 때 제가 그 헌금을 하나님께 드렸을 때의 마음은 어떤 복을 구함도 아니었고, 대가를 바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감사한 마음, 그리고 이 헌금으로 쓰여지는 곳에 대한 기대가 있었던 것이죠.

괜히 아내를 오해하는 것 같아서 미안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내일 물어봐야겠어요. 과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를..... 괜히 물어보는 걸까요? 괜시리 분란만 일으킬 것 같다는 생각이네요.



그냥 홈페이지만 캡처해 봤습니다.







비록 신자도 아니었고 게다가 서로 견해(사학법...)를 달리했다는 것도 압니다. 그리고 그렇게 고상하게 보이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주류도 아니었고 대학도 안나왔고..

그렇지만 한때 이나라의 가장 어른이었던 대통령입니다. 최소한 그를 기억해주는 한마디라도 해주면 안되는 것일까요?

저도 교인이고 하나님의 골수팬입니다. 위 홈피 중 몇곳은 제가 몸담았던 곳이기도 합니다. 현재 활동 중인 곳도 있구요. 그렇지만 그 어느곳도 그분을 추모해주는 곳은 없었습니다. 자살이라서 그런 것일까요? 아니면 홈페이지마저도 성전이라 여기는 것인지요? 그나마 삼일교회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그분에 대한 객관적 평가와 더불어 짤막하게라도 목사님의 느낌을 적어놓은 곳이 있기라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 나라, 노무현이라는 사람과 함께 이 땅에 거했던 교회 그 어느곳에서도 그의 흔적을 찾기란 너무 어렵군요. 너무 안타깝습니다. 지금 웹페이지 어느 곳을 가더라도 추모의 분위기는, 설령 그것이 마지못해서라도 전국을 덮고 있습니다.

지금껏 못마땅한 사람이었더라도 가는 길이나마 사랑의 마음으로 덮어주는 자세가 필요한 때가 아닌가 합니다.


초대교회의 교회는 말 그대로 모임공동체를 의미한다. 예를 들어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지칭할 때는 지역적으로는 고린도가 맞지만 그 지역에 위치한 어떤 특정 건물을 지칭하는 바는 아니다. 물론 교인들이 모이는 일정한 장소가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라고 이야기할땐 분명 그곳에 모이는 공동체를 지칭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피아나 삼합회 등등의 유명조직(왜 하필?^^;)을 지칭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와 같을 것이다. 마피아라고 하면 그들이 하는 행동들, 모임의 성격들이 생각나는 것이지, 거주하는 또는 활동하는 공간적인 구조물을 연상하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물론 나는 마피아 건물이 어디 있는지는 알지도 못한다^^;). 삼성하면 삼성의 인물들이나 하는 일이 생각나는 것또한 같은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우리가 다니는 교회는 정반대이다. 예를 들어 순*****교회, 온**교회, 소*교회, 광*교회. 교회이름만 들어도 당장 교회의 건물 이미지부터 떠올라진다. 그리고 부수적으로 건물의 규모와 화려함 등의 떠오르면서 그 교회의 이미지를 형성하게 된다. 정작 그 안에 있는 이들의 활동과 그 교회가 가지고 있는 진실한 가치들은 보이지 않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외형적 화려함만을 보면서 새로운 사람들이 모여들게 된다. 점점 내부또한 공허함으로 채워지게 된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유럽의 거대하고 아름다웠던 그 건물들에 이제는 관광객만 왔다갔다 한다. 외형적 가치만을 추구하다 얻게된 결과물일까?

그렇지만 최근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경향을 거스르면서 내적추구를 도모하는 교회들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다. 상가를 임대한 후 교회가 커져감에도 굳이 건물을 신축해서 확장하지 않고, 오히려 늘어난 경제력으로 어려운 지역사회와 고난을 겪는 세계인을 돕는 교회가 늘고 있다. 참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예수님이 명하신대로, 바울이 사역중에 만났던 교회들이 그런 교회들 아니었을까? 교회가 외형만으로 기억되고 평가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요 며칠 전 일이었다. 아내와 아이들은 대구 친정에 내려가서 2주간 솔로생활을 누리고 있는 중이다. 간만에 밤늦게까지 맥북프로 가지고 노느라 아침에 정신이 없었다. 머리도 좀 무겁고...

출근하면서 이것저것 챙기고 나오면서 '음 오늘은 자정을 넘겨서 들어오니까 거실 불을 켜두어야겠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금요철야예배가 있는 날이라서 밴드팀 끝나고 집에 오면 새벽 2 ~ 3시는 보통이다.

아무튼 거실 불을 켜고 현관문을 나와서 열쇠 잠그면서 문득 드는 생각은

'응? 어차피 퇴근해서 다시 집에 들릴건데 뭐하러 불켰지?'


퇴근하고 집에 들러서 베이스기타를 챙기고 차로 양재로 가야하기 때문에 금요일은 일찍 사무실에서 나온다. 집앞에 와서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까

'헉!! 이 냄새는?'

(동지가 지난 지 며칠 되지도 안았고 퇴근 무렵은 어둑어둑하다. 보통 같으면 출근 때 거실 불을 켜지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어두운 시간이므로 불을 키려고 스위치를 찾았을 것이다. 만약 그 순간 내가 스위치를 눌렀으면 어떻게 됐을까?)

가스냄새가 짙었다.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황급히 거실을 가로질러 베란다 창문을 여는 그 잠깐에도 그랬다. 거실문, 안방문, 현관문 다열고. 아! 물론 가스밸브도 잠궜다. 아마도 전날 잠깐 가스렌지 사용하면서 밸브를 열어뒀나보다.(그래서 아침에 머리가 무거웠던 것인지도)

그 순간에는 경황이 없어서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집안 공기를 환기하고 집안정리하고 기타 챙겨서 집을 나오면서 문득 드는 생각은

'그래서 아침에 필요없는 불을 킨건가?'

라는 생각이었다.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무의식 중에 누를 수 있는 스위치를 미리 눌러 놓게 하신 주님의 은혜라고 밖에는 달리 생각할 길이 없다. 물론 애시당초 밸브를 열어놓지 않았으면 됐지 않냐라는 물음도 있을 수 있겠지만 '뭐 이렇게 해서라도 당신의 자녀에게 당신의 존재를 다시 확인시키는 일이신데'라는 믿음의 선포밖에는 할 수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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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왜 합니까?'라는 질문에 '그곳에 그것이 있기 때문'이라는 누군가의 말이 떠오른다.

만약 한라산이 내 눈앞에 있다면 여행갈 필요 없다. 한라산이 있다는 믿음과 함께 그것이 보고 싶다는 갈망에 간다. 그곳에 한라산이 없다면 그곳에 갈 필요가 있을까?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거기에 분명히 산이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에...

믿음의 여행은 왜 할까? 하나님은 보이시지도 지금 내눈앞에 보이시지도 않는 분인데...

마찬가지로 그곳에 그 분이 계시다고 믿기 때문에 그리고 그분을 뵙기 원하는 갈망때문에 가는 것 같다. 가는 길이 힘들어 의혹에 휩싸이고 그만 두고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분이 계시기에 간다. 비록 지금은 알 수 없고 느낄 수 없을 때도 있지만 믿음으로 간다는 바울사도의 말이 힘이 된다.

믿음의 여정이 끝나갈 때 스데반집사처럼 나도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것을 볼 수 있을까?

콩!!

(원작에서도 영화에서도 우리가 알고있는 킹콩은 원래 그냥 콩이었다. 콩!)

공룡(티라노?) 세마리와 싸우는 장면이 영화 가운데 압권이다. 그리고 싸움에서 이긴 후 여주인공 앞에서 의기양양한 듯 또 무언가 화해하자는 듯한, 야수이지만 따뜻함이 있는 장면이었다. 얼음판에서 천진난만하게 놀던 장면 또한.

한마디로 야수판 타이타닉이었다. ^^ 도시를 아수라장으로 만들고 마지막 고층건물 탑에서 여주인공을 지키며 죽어가는 장면에서는 사람들의 아쉬움 소리도 들렸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을 발견했으니!

이렇게 콩때문에 여러사람 죽거나 다치고, 건물 부숴지고, 난리법석이 됐는데도 여주인공을 지키기 위한 모습 속에서 사람들은 감동했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장면들이 성경에 많이 나온다. 특히 구약성경을 보면 여호와는 이스라엘에게 전쟁을 하고 난 후 이방인을 싸그리 전멸시키라고 명령하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아녀자고 아이고 할 것 없이. 참 잔인한 하나님이라고 사람(특히 안티들)들은 비난한다.

왜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을까?

이스라엘, 하나님이 사랑하고 아끼는, 그리고 그들을 통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을 아끼고 아끼고 또 아끼고 그래서 그들을 지켜야만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방법을 택하신 것이다.

안 그러셨으면 어떻게 됐을까?

당연히 현대역사책에 '이스라엘은 과거 약 4천년전에 팔레스타인 주변에 거하던 민족이었음 다소 호전적이고 비타협적인 민족이었으나 이후 타민족의 문화에 그만 흡수되어 이젠 존재하지 않는 민족임'이라고만 적혀 있을 뿐이지 않을까? 콩의 방법과 하나님의 방법이 완전히 같다라고 할 수 없겠지만 왜 콩은 감동의 대상이고 하나님은 비난의 대상이 되는가?

하나님의 영이 지배하는 사람과 세상의 영이 지배하는 사람과의 차이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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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요한은 그의 사명의 한계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세례를 준 이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고 있었다.

제자들이 그에게 '왜 선생님은 이대로 계십니까? 왜 저 예수라는 자가 더 잘나가는데도 그냥 계십니까? 분하지도 않으세요? 기껏 치켜 세워주니까 이제는 선생님은 안중에도 없나 봅니다!'라고 물어와도 그는 이것이 앞으로도 계속 진행되어져야 일이며 그리고 이것이 뜻하는 것과 그 종착지가 어떠한 지를 잘 알고 있었다.

세상사를 그 겉모습만 본다면 정말 자기자신이 초라해지고 쓸쓸해질 법도 하다.

하지만 하나님이 계획하신 거대한 역사 가운데 일부와 같은, 큰 공연 전에 잠시 잠깐 나와 분위기만 잡고 들어가는, 정말로 남이 알아주지 못하는 역할을 맡는 것으로도 너무나 감격해하는 spirit이 세례요한에게 있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세례요한을 이제 현대인들에게 자랑스럽게 알리신다. '봐라 세례요한이 어떠하였는가'를. '정말 그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그러져버린 존재이냐'라고.

그래서 현대인들은 세례요한을 그 당시의 제자들처럼 선생의 존재가 점점 세상사람들에게 잊혀져가는 것을 안타까워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존재를. 그의 사역을 높이 칭송한다.

결코 그는 그의 존재가치를 드높이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낮추었다. 그리고 그는 이제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사람이 되었다.

ps :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쓰면서 세례 요한의 이 부분을 쓸 때에는 큰 감회에 잡혀 썼나 보다. 1장에 세례 요한에게 있다가 예수를 따른 두 제자 중 한명이 바로 사도 요한이다. 3:24에서 세례 요한이 옥에 갖히기 이전이라고 써놓은 부분은 요한을 추억하면서 옛 선생에 대한 경외심, 그리움이 엿보인다. 만남의 축복과 그 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라는 영화가 있었다. 제목이 인상적이었는데, 오늘 큐티를 하면서 '과연 이스라엘은 언제 세상의 중심에서 외쳐본 적이 있는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요즘의 이스라엘이야 늘 세상의 이슈의 중심에 있긴하지만, 구약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과는 다르게 늘 주변 강대국의 틈에서 고생만 하는 모습이다.

다윗과 솔로몬 시대때나 반짝 뜨긴 했지만, 그나마도 중동 일부에서나 알려진 정도 아닌가.

세계사의 중심에는 바빌로니아, 앗시리아, 이집트, 페르시아, 로마, 그리스.... 이렇듯 넓은 영토와 강력한 군사력, 훌륭한 문화를 가진 나라들이 있다. 그에 비해 이스라엘은 어떠한가?

인간의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세계사다. 물론 그 기준에는 다소 차이는 있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역사는 이러한 세계사를 통해 본다면 실패의 역사일까?

분명 그렇게 보인다. 그런데 만약 하나님의 시각에서 본다면 어떨까?

이 질문에도 역시 회의적인 생각이 우선된다. 그도 그럴 것이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라면, 당신이 인도하기로 한 민족이라면 늘 승승장구 해야하는 것 아닐까? 다윗, 솔로몬 때 그 조짐을 보이는 듯 하더니 다시 원래대로 비실비실대는 마치 중병에 걸려 죽기 일보직전에 있는 듯한 모습이라니.

중동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기독교의 역사는 그 지역의 다른 종교와 많은 유사성을 띄고 있다. 특히 고대사와 고고학의 영역에서는 하나님의 존재가 그 당시 지역에 미친 영향이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다. 즉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것처럼 단순히 아브라함, 다니엘, 솔로몬 만의 하나님이 아니였다라는 것이다.

만군의 하나님이 과연 이스라엘 민족의 테두리에만 있을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건 넌센스다. 하나님의 계획은 전 세계를 아우르면서 진행중이셨다. 그 중 그 하나님을 정확히 알고 따른 민족이 바로 이스라엘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받은 민족으로 세우신 것이다. 다른 민족과 나라들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와 의도적인 왜곡으로 인해 결국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우상숭배와 인간중심의 사회로 돌아서긴 했지만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그 당시에도 글로벌했다라는 것을 명심해야할 듯 하다.

이사야 37장 26절에 보면 "네가 어찌 듣지 못하였겠느냐 이 일들은 내가 태초부터 행한 바요 상고부터 정한 바로서 이제 내가 이루어 너로 견고한 성을 헐어 돌무더기가 되게 하였노라 " 27절 "그러므로 그 거민들이 힘이 약하여 놀라며 수치를 당하여 들의 풀같이, 푸른 나물같이, 지붕의 풀같이, 자라지 못한 곡초 같았었느니라"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시각의 방향을 보여주신다.

요즘 새로 번역된 성경에는 "앗시리아 왕아, 네가 틀림없이 들었을 것이다. 나 여호와가 오래 전에 이 일들을 결정했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도 예전에 이미 계획한 일들이다. 그래서 이제 네가 성벽이 있는 저 굳건한 성들을 잿더미로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 성에 사는 백성들이 겁을 내고 두려움에 떤 것이다."

구약성경에서는 종종 이방인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무리들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따르면 좋겠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더라도 하나님의 영향력이 분명히 세계 곳곳에 미치고 있음을 성경을 통해 간접적으로 알게된다.

토미 테니의 "하나님의 관점"을 읽어 보셨는지?

이 책에서 토미 테니가 강조하는 것처럼 나님의 시각과 인간사이에는 너무나도 큰 시각차가 존재한다. 분명히 인간의 눈으로 보면 의롭고 정당한 일도 하나님 시각에서는 아무것도 아니게 된 것이 있는가 하면,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듯 했지만 절대자에게는 정말 중요한 초석이 되는 것들 말이다. 이것을 분별할 만한 능력이라는 것은 공부한다고, 연습한다고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일국의 왕이라면 그정도의 능력은 가져야 하는 것 아니냐라고 물어볼 수 있겠지만 정작 히스기야는 그렇지 못함을 한탄했을 뿐이지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조망할 줄은 몰랐다. 그래서 이사야에게 그의 신하를 보낸 것일 터이다. 그렇다면 이사야같은 선지자가 세상을 통치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나님의 시각을 알 게 됐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 분명히 그랬다. 사울왕 이후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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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들을 좌석에 앉히고, 자신이 자동차를 운전해야 한다는 어머니의 주장에 대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머니는 운전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만 아이는 모른다. 어머니가 초등학생 자녀에게 운전대를 맡기지 않는다고 해서 권력 중독자라는 꼬리표를 붙일 수는 없지 않은가!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주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시는 것은 그분만이 우주를 운영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분은 태초부터 절대적 주권 즉 다스릴 권리를 갖고 계셨다. 그분은 창조자시고,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이다. 그러나 그분의 백성에게 절대적 지배권을 행사하시는 주권적 왕의 개념은 평등을 외치는 서구인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이 부분에 대해 우리는 할 말이 많다. 우리는 투표로 지도자를 뽑는다. 우리는 군주 앞에 엎드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반대로 우리 자신이 군주가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최소한 대의제(代議制) 형태의 정부를 갖는다.
하지만 그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와 예수 그리스도의 주 되심은 중력의 법칙만큼이나 결정적이고 구속력이 있으며 타협할 수 없는 진리다. 아니 그 이상이다. 이것은 모든 인간이 받아들여야 하는 진리다. 20세기 성경 주석가 캠벨 몰간이 주장하듯이, 하나님의 주 되심에 저항하는 자들은 다른 주인들의 압제를 자처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의지 - 내어맡김」/ 낸시 레이 드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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