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요한은 그의 사명의 한계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세례를 준 이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고 있었다.

제자들이 그에게 '왜 선생님은 이대로 계십니까? 왜 저 예수라는 자가 더 잘나가는데도 그냥 계십니까? 분하지도 않으세요? 기껏 치켜 세워주니까 이제는 선생님은 안중에도 없나 봅니다!'라고 물어와도 그는 이것이 앞으로도 계속 진행되어져야 일이며 그리고 이것이 뜻하는 것과 그 종착지가 어떠한 지를 잘 알고 있었다.

세상사를 그 겉모습만 본다면 정말 자기자신이 초라해지고 쓸쓸해질 법도 하다.

하지만 하나님이 계획하신 거대한 역사 가운데 일부와 같은, 큰 공연 전에 잠시 잠깐 나와 분위기만 잡고 들어가는, 정말로 남이 알아주지 못하는 역할을 맡는 것으로도 너무나 감격해하는 spirit이 세례요한에게 있었다.

하나님은 이러한 세례요한을 이제 현대인들에게 자랑스럽게 알리신다. '봐라 세례요한이 어떠하였는가'를. '정말 그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그러져버린 존재이냐'라고.

그래서 현대인들은 세례요한을 그 당시의 제자들처럼 선생의 존재가 점점 세상사람들에게 잊혀져가는 것을 안타까워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존재를. 그의 사역을 높이 칭송한다.

결코 그는 그의 존재가치를 드높이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낮추었다. 그리고 그는 이제 하나님의 나라에서 큰 사람이 되었다.

ps :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쓰면서 세례 요한의 이 부분을 쓸 때에는 큰 감회에 잡혀 썼나 보다. 1장에 세례 요한에게 있다가 예수를 따른 두 제자 중 한명이 바로 사도 요한이다. 3:24에서 세례 요한이 옥에 갖히기 이전이라고 써놓은 부분은 요한을 추억하면서 옛 선생에 대한 경외심, 그리움이 엿보인다. 만남의 축복과 그 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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