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최신작 '대홍수'를 봤다.
다모앙에서 하도 평이 안좋길래 볼까 말까 하다가 그냥 킬링 타임용으로 가볍게 봤다.

 
영화는 타이틀은 어그로를 끌기 위해 그렇다쳐도 영화소개를 재난영화라고 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요즘 시청자들은 그런 거에 쉽게 현혹되지는 않으니 그렇지만 평점테러하는 이들에게는 아주 좋은 소재이니까.
나도 초반에는 재난영화라고 알고 블록버스터 급의 액션과 CG가 들어가는 그런 영화인가 했다. 그러다가 영화가 도입부를 지나 어느 시점에 이르면서 내 머리 속에 떠오르는 게임이 하나 있었다.

 

 
'니어 오토마타' 소위 엉덩마타라 불리우는 게임계를 한 때 휩쓸고 심지어 애니화까지 되어 지금도 많은 이들이 찾는 그 게임.
보통 게임을 하다보면 많은 게이머들이 다회차 진행을 하곤 한다. 같은 게임을 여러 번 하면서 능숙해진 스킬과 업체가 제공하는 특전을 이용해 수월하게 하는 이점이 있어 그렇기도 하고 한 번 빠진 게임을 손에서 놓을 수 없어 그렇기도 하다.
그런데 '니어 오토마타'는 그런 게이머들의 성향을 잘 파고 들어 이전에 접할 수 없었던 그들만의 매우 독보적인 게임을 만들었다. 보통 내 경우 아무리 대작 게임이라도 엔딩 한 번 보면 끝내는데, 니어는 그럴 수 없었다. 다회차를 하지 않으면 진짜 엔딩을 볼 수 없게끔 했기 때문에.
 
결국 수차례에 걸쳐 게임을 다시 하게 됐는데, 회차마다 다른 주인공을 통해 플레이하면 같은 장면도 다른 의미로 다가오게 되고 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플레이어는 몇회 정도이지만, 게임 배경을 보면 메인 캐릭터들은 그러한 과정을 수없이 겪고 있었고 그러면서 각각의 기억들이 누적되어 현재 플레이하고 있는 캐릭터에 영향을 주고 있었던 것.
이 게임 또한 인류의 멸망이 눈 앞에 다가온 상황에서 이를 AI와 안드로이드를 통해 막고 새로운 인류를 위한 길을 마련한다는 게 주요소재인데 '대홍수'와 유사한 점이 있다.
'니어 오토마타'는 화려한 액션과 엉덩마타 만이 아니라 휴머니즘 또는 존재에 대한 의미를 되묻는 꽤나 철학적인 게임이었다. 이 게임의 연혁을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지만 다회차 진행을 한 후 진엔딩을 본 뒤에도 여운이 오래 가는 걸 보면 엄청난 작품이었음에는 틀림없다. 한 가지 더 보태보면 OST도 매우 훌륭했다. 내가 좋아하는 OST 중에 손에 꼽을만큼 좋았으니까.
 
여하튼 그런 느낌으로 다가온 게 '대홍수'였다. 다만, 좀 더 런닝타임을 더 두고 배경서사를 밀도있게 깔아줬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보니 명작까지는 아니라도 개인적으로는 수작임은 틀림없다 생각한다.

예전에 썼던 글을 다시 보면서 AI 보고 다듬어 보라고 하니 훨씬 깔끔하기는 한데 뭔가 거친 맛이 좀 줄어든 느낌이긴 하다.

https://meteos.tistory.com/584

<원글>

I have faith in God.
나는 신을 믿는다.

I believe in friend.
나는 내 친구를 믿는다.

믿음, 신뢰? trust? faith? belief?

과연 믿음은 무엇일까? 아니 기독교인, 크리스챤에게 믿음은 뭘까?
지금 부적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송을 보면서 저들이 말하는 믿음은 생사화복을 중심으로 그것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하지만, 과연 예수를 구원자로 믿는 나, 또는 우리는 무엇이 믿는 것인가라는 물음을 다시 묻게 된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이지 생사화복을 잘 지켜 줄 것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
친구를 좋아하고 의지하니 믿는 것이지, 그가 나에게 베풀 것을 기대하고 믿는 것이 아니니까.

믿음이 간다 이런 말을 할 때 상대의 말과 행동이 일치할 때 사용하곤 한다.

말.

서로의 생각을 알려고 하면, 소통이 있어야 한다. 오고 가는 대화나 문장 속에서 상대의 생각을 알게 되고 나와 같은 점은 기뻐하고 다른 것이 있다면 더 깊은 대화를 통해 이해하거나 일치하거나, 아니면 그냥 인정하게 되던지.
또한 행동함으로 그 이해와 신뢰의 수준을 깊게 하는 것.
그래서 상대의 어렵거나 이해 못 할 상황에서도 기다려주고 헤아려주게 되는 것.
그 간에 쌓여가는 많은 작은 역사들, 히스토리.

그런데 지금의 신앙의 수준은 부적과 같아서 믿음의 주체인 나와 상대의 이야기가 아닌 그 결과물에만 주목하는 것이다.
만약 그 부적이 아무런 효험도 없었다면(내 생각에는 통계와 확률의 범주지만) 과연 방송에 나와 기쁨을 보여주고 무한한 신뢰를 보여줬을까?
많은 교회에서 회중기도, 새벽기도, 대표기도, 개인기도 중에 개인의 생사화복에 대한 간구로 넘쳐난다.
나와 하나님 간의 깊은 관계, 신뢰, 소통이 있다면 과연 그 초점이 저런 것에만 맞춰지게 될까?

이 글을 끄적이는 처음에는 부적과 믿음의 차이가 뭔가라고 하려했는데 쓰다보니 이 시점에 그간 성경을 멀리 하고 있던 나에게도 새로운 목적이 생긴다.
한 동안 왜 성경을 읽어야 하는가 하는 회의감이 들었었다.
주변에 보이는 성경통독, 성경백독, 성경필사 등등… 너무도 많은, 알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성경에 대한 행사들은 나같은 이들에게 되려 거부반응만 일으켜왔음을 고백한다. 성경을 백독했더니 병이 나았어요, 축복이 넘쳐요 등등. 그래서 대체 저 모습이 부적과 다를 게 뭔가라는 등등의 생각들.

물론 그 과정 속에 진정으로 하나님과의 대화의 장에 빠진 분들도 있겠다. 그래서 그런 노력과 수고를 폄하하고만 싶지는 않다. 그렇지만 마치 그것만이 목적인양 진리인양 나팔처럼 불어대는 소음이 너무 많아서 피로했다.

하지만 친구는, 신뢰하는 이는 서로 대화한다. 소통한다. 그것은 말이고 대화다.
하나님은 나에게 어떻게 소통하시는가? 성경 아니겠는가?

성경 아니라도 이 세상이 그 분의 존재를 알려주지 않는가라는 생각도 했었다. 굳이 성경 자주 안봐도 세상에 뿌려져 있는 하나님의 흔적만 봐도 은혜롭지 않은가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믿는 이가 멀리 있을 때 그를 그리워하며 그의 흔적을 통해 그를 기억하는 것도 있지만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한계가 있다. 그래서 간간히 편지도 하고 전화도 하고 여차하면 어디선가 만나서 서로의 안부를 묻기도 하는 것 아닐까? 그런데 나에게는 그 분이 남겨놓은 글들이 몇천년 동안 보존되며 여지껏 펼쳐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성경을 내 옆에 덩그러니 놓고 ‘봐라. 내 말이다. 쓸쓸해하지 말고 외로워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고 내 말이니까 늘 두고 봐, 곧 올게’라고 하시는데 이제 안 볼 수 있나?

라고 이렇게 끄적여놨는데 과연 1년 쯤 뒤에 나는 어디 즈음에 있을까? 그래서 주변에서 나를 체크해 줄 필요를 느낌. ㅎㅎ

 

<수정 한 글>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나는 내 친구도 믿는다. 그런데 이 ‘믿는다’는 말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영어로는 faith, trust, belief라고도 하지만, 과연 크리스천에게 ‘믿음’은 무엇일까?

오늘 우연히 부적에 대해 다루는 방송을 보며, 그들이 말하는 ‘믿음’은 대부분 생사화복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효험을 기대하고, 어떤 결과를 얻기 위한 믿음. 하지만 예수를 구원자로 믿는 나는, 혹은 우리는, 과연 무엇을 믿는 것일까?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성품과 약속에 대한 신뢰이지, 나의 삶이 잘 풀릴 것이라는 결과에 대한 기대가 아니다. 마치 친구를 믿는 것이 그가 나에게 무언가를 해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신뢰하고 좋아하기 때문인 것처럼 말이다.

흔히 “믿음이 간다”는 표현을 쓰곤 한다. 그 말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삶에서 진정성이 느껴질 때 자연스럽게 나온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화와 소통이 필요하다. 상대의 생각을 이해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다름을 인정하는 과정을 통해 신뢰는 깊어진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다. 진정한 믿음이란 그분과의 소통과 신뢰 속에서 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많은 신앙은 마치 부적과도 같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대화보다, 결과물에만 집중한다. 만약 부적이 ‘효과가 없다면’ 그 믿음은 지속될 수 있을까?

오늘날 교회에서 드려지는 많은 기도들—회중기도, 새벽기도, 대표기도—를 들여다보면, 그 내용은 개인의 삶의 문제 해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도우시는 분이지만, 정말 그분과 깊은 신뢰와 교제가 있다면, 우리의 기도의 초점은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나는 한동안 성경을 멀리했다. 성경통독, 백독, 필사 등 성경 관련 행사를 보며 “이게 다 무슨 의미인가”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병이 나았다, 축복이 넘쳤다는 간증들보다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과 진정한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치 그것이 ‘정답’인 양 떠들어대는 분위기는 나 같은 사람에게 피로감만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결국 ‘소통’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와 말씀하실까? 바로 성경을 통해서다. 물론 하나님의 흔적은 세상 곳곳에 있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에게 직접 남겨주신 말씀, 성경이야말로 그분의 가장 확실한 ‘편지’다.

멀리 떨어진 친구의 흔적만 보고는 오래가지 못한다. 직접 편지를 주고받고, 때로는 만나 대화해야 진정한 관계가 유지된다. 성경은 그렇게 내 곁에 놓여 있다. “이것이 내 말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고, 외로워하지 마. 나는 곧 올 거야.” 그렇게 말씀하시며,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다.

이 글을 쓰다 보니, 나도 다시 성경 앞에 서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다. 지금은 모르겠다. 하지만 1년 뒤쯤의 나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그래서 주변의 누군가가 나를 지켜봐주고, 이 여정을 같이 걸어가 주었으면 좋겠다. 😊

이번 주일 낮 설교를 듣다 어느 부분에서 뜬금없이 드는 생각이었다. 물론 이전부터 계속되어온 생각이긴하다.

“진화론과 성경의 창조 이야기는 서로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가?”

아주 오래된 질문이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을 갈라놓는 주제다. 누군가는 과학이 신앙을 위협한다고 말하고, 또 누군가는 신앙이 과학을 부정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정말 그래야만 할까?

 

과학과 신앙은 언제나 싸워왔을까?

역사를 돌아보면, 새로운 과학적 발견이 나올 때마다 교회는 처음엔 경계했다. 지동설을 주장했던 갈릴레오는 성경의 문자적 해석과 충돌하며 고초를 겪었지만, 결국 인류는 그가 옳았다는 걸 받아들였다. 시간이 지나자 교회는 “지구가 돈다고 해서 하나님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늘날 분자생물학, 유전학, 고고학은 인류의 기원과 이동을 과학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발견들은 신의 존재를 부정하기보다는 “창조의 질서가 얼마나 정교한가”를 보여주는 과정이라 볼 수도 있다.

결국 과학은 ‘어떻게’를 묻고, 신앙은 ‘왜’를 묻는다. 질문이 다르다면, 굳이 싸울 이유가 있을까?

 

진화론은 신앙의 적이 아니다

진화론은 생명이 환경에 적응하며 변해온 과정을 설명하는 과학적 이론이다. 이것은 ‘신이 없었다’는 주장이 아니라 ‘생명이 변화하는 방식이 이러하다’는 설명에 가깝다. 

성경이 말하는 창조는  “하나님이 세상을 질서 속에 세우셨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진화의 과정은 창조의 질서가 시간 속에서 펼쳐지는 방식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매일 변화하고, 배우고, 성장한다. 세상도, 사회도, 기술도 그렇다. 자동차가 해마다 새로운 모델로 개선되고, 사람의 생각이 끊임없이 진화하듯 우리는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진행 중인 작품’이다. 그 점에서 진화의 원리는 삶 자체의 모습과 닮아 있다.

 

오해의 근원 ― ‘이념’으로 과학을 재단할 때

종종 진화론은 유물론이나 포스트모더니즘 같은 철학적 사상과 한데 묶여 비판받는다. 하지만 진화론은 사상이 아니라 관찰된 현상을 설명하는 과학적 모델이다. 유물론이 진화론을 자기 철학의 근거로 삼는 건 가능하지만, 그건 과학의 책임이 아니다.

과학은 사실을 발견하는 도구이며, 신앙은 그 사실 속에서 의미를 찾는 여정이다. 둘은 서로 다른 질문을 던질 뿐 서로를 부정하지 않는다.

진화론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신앙이 흔들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생명의 복잡성과 아름다움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이 이렇게 섬세하게 움직이는구나.” 그 경이로움을 과학이 보여줄 뿐이다.

과학과 신앙은 싸움의 상대가 아니라 서로의 시야를 넓혀주는 두 개의 창이다. 하나는 세상의 구조를 보여주고, 다른 하나는 그 구조 안에 담긴 의미를 비춘다. 진화는 단지 생명의 역사에 관한 설명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는 창조의 현재진행형일지도 모른다.

 

이번 맥OS 타호에서 가장 반가운 점은 바로 영상파일 아이콘 옆에 있었던 흉칙한 검은색 바가 사라진 것.

무슨 이유에선지 지난 소노마인가 쉐콰이어부턴가 mp4와 같은 영상 파일 아이콘 옆에 검은색 바가 붙기 시작했다. 나만 그런가 했더니 레딧에서도 그런 현상이 있다고 하고. 여하튼 다른 맥에 오에스를 설치해봐도 동일하길래 대체 이게 무슨 짓인가 싶었는데.

상단 우측 두번째 하얀색이 검은색이었다고 상상해봐. 얼마나 흉측했겠어?


알흠다운 MacOS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와줘서 너무 고맙다. 뭐 다른 기능 다 필요없다. 맥은 원래 이런 우아한 맛에 썼으니까. 제발 헛짓 좀 하지마라.

애플이 ‘애플다운’ 적은 언제였던가 하고 되돌아보면, 이런 순간들이 떠오른다.

예를 들어, PC의 창세기 즈음에 사람들은 막연히 “뭔가 그런(?) 것이 필요해”라고 애매모호하면서도 강한 욕구를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애플 II와 매킨토시로 있게 되었으니, 참 보기에 좋았더라. ^^

그다음은 여러 미디어 기기들로 세상이 혼잡하던 시절이었다. 그때도 마찬가지로 “이걸 어떻게 깔삼하게 하나로 합칠 수는 없을까?”라는 시장의 요구가 있었고. 여러 어설픈 시도들과 어렴풋한 형태들을 내놓으면서 점점 기대치가 높아지는 가운데, 결국 그것은 아이폰으로 있게 되었으니 역시 참 보기에 좋았다. ㅎㅎ

스티브 잡스 사후, 애플에 혁신이 있네 없네 말들이 많았지만, 앞서 언급한 애플이 보여준 수준 이상의 혁신과 창조는 이후 어떤 다른 회사에서도 아직까지는 보이지 않는 듯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잡스가 위대하다고, 애플이 대단하다고 말하는 게 아닐까 싶다. 물론 디지털 기기로만 한정해서 그 의미를 축소할 수도 있지만, 그 영향력이 사회 전반에 미친 바가 워낙 크고, 그것을 애플은 두 세기에 걸쳐 이루어냈다.

세상에는 많은 위대한 기업들이 있었지만, 인류 문명을 새로운 지경으로 인도한 기업은 그리 많지 않다. 특히 IT로 대표되는 현대 문명 속에서 애플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물론 그 근간에 있는 HP, Xerox, Microsoft, Oracle, Google 같은 기업들의 영향력 또한 엄청나기는 했지만 말이다.

여하튼, 21세기도 벌써 4 반세기가 지나고 있는 이 시점에, 이전처럼 안개처럼 희미하면서도 강력하게 구체화되기를 바라는 ‘무엇’은 과연 무엇일까? 애플도 Vision Pro 같은 것으로 그것을 실현하려 하고 있지만, 아직은 아닌 것 같고. OpenAI의 ChatGPT일까? 양자컴퓨팅이 뭔가 이뤄낼까? 보스턴 다이내믹스의 로봇 같은 것일까?

잡스 같은 비저너리가 없어서일까? 무언가가 구체화되려는 시점이 다가오는 것 같긴 한데, 아직까지는 모르겠다. 그간 개발되고 상품화된 것들이 이전보다 대단한 건 맞지만,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고 채워져야 할 부분도 많아 보인다. 한마디로, ‘눈이 번쩍 뜨이는 무언가’가 아직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때에 잡스는 늘 “이거야!”라며 우리 눈앞에 들이밀었는데 말이다. 다른 어떤 회사들처럼 “너희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 넣어봤어”가 아니고. 

아무튼, 조만간 내 눈을 번쩍 뜨이게 할 무언가가 오고 있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뭐랄까, 이건 일종의 주기 같은 게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마치 무어의 법칙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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