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부류일 듯 하다.
1. 군대는 다녀왔는데 전쟁하고 싶어 발정난 놈 들.
2. 그리고 군대는 간 적 없지만 지들 보기에 못마땅해 보이는 이들.

청와대 청원글에 우크라이나 침공 어쩌고 하면서 군에 간 자식들 휴대폰을 몰수해야 한다나.
미친 놈들. 그것 때문에 군내 병영사고가 얼마나 줄었는데.
군대 기강이 헤이해졌느니 어쩌니 하면서 기껏 생각해냈다는 것이 휴대폰 반입 금지.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고, 윗대가리들이 일만 똑바로 하면 장병들이 휴대폰을 들여다보던, LOL 쳐하고 있던 문제 될 게 아니다. 어차피 군대는 위에서 수직으로 명령 내려오는 곳이니 시키면 할테고, 전쟁터 나가서 싸우라면 싸워야 한다. 그런데 관리자들이 저 할일 똑바로 안하고 군납비리나 저지르고, 병영환경 엉망으로 해놓고 휴대폰만 뺏어가면 임무수행이 제대로 된다던?

군대는 사기다. 사기를 진작시키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을거다. 그리고 그 방법은 그 시대의 흐름에 맞춰 가는 것도 있을 테고. 군대 첫 입대해서 몇 주 또는 몇 개월 세상과 단절돼서 지내 본 이들은 다들 알 거다. 
분리된다는 것의 두려움. 
그건 연인 간의, 부모 형제와의, 지인들과의 관계 뿐만 아니라 매일 매일 변해가는 세상의 흐름으로부터 멀어져 간다는 공포다. 그걸 견디지 못하다보면 탈영하는 이들도 발생하고 심지어는...
그래서 휴대폰의 지급이 병사들에게 주는 긍정의 힘은 산술적으로 계산할 수 있는게 아니다.

정작 우크라이나에서도 예전의 전쟁과는 다르게 현장의 적나라한 영상이 전달되다보니 그런 측면에서는 안타까움이 크지만, 반면 마냥 밀릴거라고 여겼던 약자의 분투가 세상에 그대로 보여지면서 그들 스스로를 더 묶어주는 여지껏 경험해보지 못한 큰 효과를 거두고 있다. 그래서 일론 머스크가 스타링크를 우크라이나에 보낸다고 하지 않나.

분명 우리군에서 어쩌다보니 도입한 휴대폰 도입은 지금도 기대 이상의 효과지만 전장에서도 기존의 틀을 깨는 효과를 줄 거다. 그런데 휴대폰을 뻇으라고? 미친 새끼들. 전쟁하고 싶어 발정난 개새*들. 저들은 정작 일 터지면 가장 먼저 벙커로 아니 물건너 지들 조국으로 도망갈 놈들일 듯 하다.

큰 아이도 몇 년 뒤면 군대가게 될 텐데 스마트폰 하나가 자녀와 부모에게 주는 위로와 안도감은 겪기도 전이지만 벌써 체감된다.
헌법에 대한민국 국민은 국방의 의무를 지게 되어있다. 아들들이 조국의 영토를 지키러 가는 거지 무슨 수도승 되러 가는거는 아니잖는가? 
맨 앞에 말했던 휴대폰 뺏자는 놈들, 지 아들들은 군대를 보냈을까? 물론 보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대다수의 국민이 그 인간들의 생각과 다른데 왜 지 생각이 옳다고만 주장하는지.

 

 

인생은 천피스 또는 만피스 퍼즐 같다.
결과물을 보면서 퍼즐을 풀면 쉽게 풀어갈 수 있다.
그런데 결과물을 알 수 없다면?
미노타우루스의 미궁처럼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할 테고, 그럼에도 결과물을 얻는 것은 쉽지 않다.
태생부터 정답을 알고 있는 인생이라면 퍼즐 맞추 듯이 쉽게 조합해 나간다. 그런데 주변에 어떠한 도움도, 또는 변변한 조력을 받을 수 없는 경우라면 후자와 같다.
그래도 노력 여하에 따라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한다면 결국에는 그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이번에는 두 개의 인생이 만났다. 그래서 그 퍼즐을 풀어가고자 한다.
두 명이 머리를 맞대 풀어가니 그나마 서로에게 도움이 될 지도.
그런데 서로의 퍼즐이 다른 퍼즐이었다면?
아무리 맞춰봐도 결과는 나올 수 없다.
비슷한 조각들은 있을 수 있다. 모양이 비슷한데 그 조각의 그림이 다르다. 
아무튼 결과는 나올 수 없다.

결혼이 그런 것 아닌가 싶다.
성격이 달라도, 살아가는 방법이 달라도, 방향이 같으면 그 결혼은 지속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결혼을 유지하는 요소에 대한 의견이 각각 다를 수는 있겠지만 퍼즐처럼 서로 다른 조각을 가지고 합치려고 한다면 아무리 노력해도 그 끝을 볼 수 없을 것 같다. 
사전에 서로 다른 퍼즐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면 시작도 안했거나 대안을 마련했을 수도 있었을테다. 그마저도 제3자의 확인이 아니고서는 두 개인지 알 길이 없다.
왜 우리는 안 맞는 거지라는 의문표와 힘겨운 노력만을 계속 기울일 뿐 해결은 할 수 없다.

흠.... 이 글을 끄적이는 내 상황이 그러한가보다.
이십년 넘은 결혼생활. 누군가에게는 겉보기에 그럭저럭 좋아보이기도 한 모양이겠지만 정작 그 안의 혼돈과 괴로움을 어떻게 알까?
분명 서로 다른 퍼즐을 들고 결과물을 내려고 하는 상황인 듯 하다. 우리 부부는. 결국...

교회가 이 지경이 된 이유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개인적인 견해로는 두 가지.
1. 신사참배에 대한 트라우마
일제강점시기에 신사에 대한 참배를 교회 대다수가 참여하면서 광복 이후 그 부끄러운 행위에 대한 교회의 잠재의식에 자리잡은 외상후 또는 이른바 트라우마.
이러다 보니 코로나 시국에서 방역을 위한 명단 제출 등을 거대권력에 대한 굴종으로 보고 처벌을 불사하며 제출을 거부하는 것은 저 기저의식에 깔려있는 신사참배라는 트라우마 때문 아닐까? 현 정부를 적그리스도, 악의 세력으로 인식하는 상당수의 교회라면 더더욱.
2. 목사 양산 시대
그럼 이런 어처구니 없는 잘못된 인식에 대해 그것도 일반 교인들까지 이런 비상식적인 이해를 하고 있는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교회의 유일한 해결책은 이끄는 목사의 능력인데, 글쎼다. 질과 양 중에서 양만을 중시하여 능력과 자질이 수준 이하인 아니, 당초에는 멀쩡했을지라도 최종 결과물은 왜곡된 현실인식을 하는 목회자들이 양산됐다.
그런데 왜 꼭 목사만일까?
목사만이 하늘과 땅을 잇는 유일한 통로라는 구약시대 제사장의 권위를 신약시대에도 그대로 적용하는 몰이해. 그래서 오로지 목사 만이 중요한, 평신도는 그냥 따라만 와라는 기이한 형태를 가진 한국만의 목회자 산업이 탄생된 데 기인하는 것으로 본다.
독일도 나치독일 시절 본 회퍼 목사같은 분 덕에 종전 후 그들의 신앙을 되짚어 보고 진정한 참회를 이끌어냈다고 본다.
우리나라도 그에 못지 않은 주기철 목사, 손양원 목사같은 분들이 있음에도 광복 이후 교회는 신사참배에 대한 트라우마를 이 분들 이름을 들먹이는 것만으로 대충 넘어가고 이후 권력에 빌붙어 아니 권력의 한가운데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니 지금처럼 광복 이후 뿐만 아니라 수백~수천년간 누려온 기득권에 대한 시대적인 대변혁을 맞이하여 이들과 결탁하여 잘 지내온 교회의 핵심권력들이 움직였다고 여겨진다. 비록 개교회로 흩어져 있는 듯 하지만 같은 이해 가운데 그 들 밑에 깔려있는 수많은 교회와 목회자들에게 중세 교황처럼 교시하고 세뇌하면서 이 지경에 이른 듯 하다.
'돈, 섹스, 권력'이라는 책이 90년대 초에 두란노서원에서 나와서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교회에 대해 지적한 것이지만 결국 이 마저도 면피용으로 끝난 것 같다. 3종세트를 모두 획득한 채로 말이다.

p.742(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

"오늘날에도 신의 유일성을 왜곡해서 이교도에 대한 배척과 분쟁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그때 역시 신앙을 자신들의 세속적 탐욕에 이용하는 불순한 세력(성직자, 정치가 ,상인)이 선동해서 저지른 반그리스도적이고 반신앙적인 만행이었지요. 우리는 여기서 “최선의 것의 부패는 최악이다(Corruptio optimi pessima)”라는 오랜 격언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십자군을 일으키며 “신의 뜻이시다(Deus Le Volt)”라는 구호로 민중을 선동했던 중세 성직자들이 그랬듯이, 신을 왜곡하여 빌미로 삼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가장 쉬운 선동 방법이지만 가장 나쁜 방법이기도 하지요."

중세에만 존재하는 십자군이 아니다.
현 시대에도 존재했던 아니 지금도 존재하는 십알단이 있고 신천지가 있다.

성직자 -교회 총회, 전광훈 같은..
정치가 - 음... 요즘 핑ㅋ당?
상인 - 순실전자

이런 커넥션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 퍼져 있을테다.

https://m.clien.net/service/board/lecture/14707167?od=T31&po=0&category=&groupCd=allreview

매번 클리앙의 글만 퍼오기는 하지만 이 시대를 사는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생각해봐야 할 주제라고 여기는지라.

핵심은 종교는 현세대의 기준으로는 비합리적인게 맞고 그걸 인정할 수 있어야하는데 많은 교인들은 비합리적(사실의 문제)=BAD(선악의문제) 이런 범주의 오류에 빠져 있다는 것. 그래서 이걸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

어릴 때 교회를 통해 회개와 구원에 대한 믿음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칼 세이건의 'COSMOS'를 다섯번 이상 탐독하면서 신앙과 과학에 대한 견해를 나름 가지고 있었던 터라 종종 교회 안에서 창조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그냥 듣고 있자면 논쟁거리로 갈 것 같아 그냥 입다물고 있는 경우도 있고 어떨 때는 이단아처럼 대해질 때도 있지만 어쩌겠나?

생각이란게, 내 믿음이란 게 뇌 속의 사고과정, 그것도 양자수준의 세계에서 임의로 결정되다보니(될 것이라고 요즘의 뇌과학에서는 설명하는 것 같다) 어린 그 시절 머릿속의 어떤 결정으로 인해 여지껏 이르렀는데 그걸 어떻게 바꾸나? 이걸 설명하고자 하면 꽤나 긴 글이나 시간이 필요할테니 생략하고.

아무튼 그나마 나름대로는 신의 존재에 대해 의심이 없는 것 하나로 여지껏 버티고 있는 것이다만 요즘의 교회 꼬락서니 보고 있자면 회의도 많이 들지만 바울사도를 통한 성경 말씀에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지. 희망이 있고 건전한 교회도 많다.



I have faith in God.
나는 신을 믿는다.

I believe in friend.
나는 내 친구를 믿는다.

믿음, 신뢰? trust? faith? belief?

과연 믿음은 무엇일까? 아니 기독교인, 크리스챤에게 믿음은 뭘까?
지금 부적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송을 보면서 저들이 말하는 믿음은 생사화복을 중심으로 그것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하지만, 과연 예수를 구원자로 믿는 나, 또는 우리는 무엇이 믿는 것인가라는 물음을 다시 묻게 된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이지 생사화복을 잘 지켜 줄 것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
친구를 좋아하고 의지하니 믿는 것이지, 그가 나에게 베풀 것을 기대하고 믿는 것이 아니니까.

믿음이 간다 이런 말을 할 때 상대의 말과 행동이 일치할 때 사용하곤 한다.

말.

서로의 생각을 알려고 하면, 소통이 있어야 한다. 오고 가는 대화나 문장 속에서 상대의 생각을 알게 되고 나와 같은 점은 기뻐하고 다른 것이 있다면 더 깊은 대화를 통해 이해하거나 일치하거나, 아니면 그냥 인정하게 되던지.
또한 행동함으로 그 이해와 신뢰의 수준을 깊게 하는 것.
그래서 상대의 어렵거나 이해 못 할 상황에서도 기다려주고 헤아려주게 되는 것.
그 간에 쌓여가는 많은 작은 역사들, 히스토리.

그런데 지금의 신앙의 수준은 부적과 같아서 믿음의 주체인 나와 상대의 이야기가 아닌 그 결과물에만 주목하는 것이다.
만약 그 부적이 아무런 효험도 없었다면(내 생각에는 통계와 확률의 범주지만) 과연 방송에 나와 기쁨을 보여주고 무한한 신뢰를 보여줬을까?
많은 교회에서 회중기도, 새벽기도, 대표기도, 개인기도 중에 개인의 생사화복에 대한 간구로 넘쳐난다.
나와 하나님 간의 깊은 관계, 신뢰, 소통이 있다면 과연 그 초점이 저런 것에만 맞춰지게 될까?

이 글을 끄적이는 처음에는 부적과 믿음의 차이가 뭔가라고 하려했는데 쓰다보니 이 시점에 그간 성경을 멀리 하고 있던 나에게도 새로운 목적이 생긴다.
한 동안 왜 성경을 읽어야 하는가 하는 회의감이 들었었다.
주변에 보이는 성경통독, 성경백독, 성경필사 등등… 너무도 많은, 알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성경에 대한 행사들은 나같은 이들에게 되려 거부반응만 일으켜왔음을 고백한다. 성경을 백독했더니 병이 나았어요, 축복이 넘쳐요 등등. 그래서 대체 저 모습이 부적과 다를 게 뭔가라는 등등의 생각들.

물론 그 과정 속에 진정으로 하나님과의 대화의 장에 빠진 분들도 있겠다. 그래서 그런 노력과 수고를 폄하하고만 싶지는 않다. 그렇지만 마치 그것만이 목적인양 진리인양 나팔처럼 불어대는 소음이 너무 많아서 피로했다.

하지만 친구는, 신뢰하는 이는 서로 대화한다. 소통한다. 그것은 말이고 대화다.
하나님은 나에게 어떻게 소통하시는가? 성경 아니겠는가?

성경 아니라도 이 세상이 그 분의 존재를 알려주지 않는가라는 생각도 했었다. 굳이 성경 자주 안봐도 세상에 뿌려져 있는 하나님의 흔적만 봐도 은혜롭지 않은가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믿는 이가 멀리 있을 때 그를 그리워하며 그의 흔적을 통해 그를 기억하는 것도 있지만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한계가 있다. 그래서 간간히 편지도 하고 전화도 하고 여차하면 어디선가 만나서 서로의 안부를 묻기도 하는 것 아닐까? 그런데 나에게는 그 분이 남겨놓은 글들이 몇천년 동안 보존되며 여지껏 펼쳐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성경을 내 옆에 덩그러니 놓고 ‘봐라. 내 말이다. 쓸쓸해하지 말고 외로워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고 내 말이니까 늘 두고 봐, 곧 올게’라고 하시는데 이제 안 볼 수 있나?

라고 이렇게 끄적여놨는데 과연 1년 쯤 뒤에 나는 어디 즈음에 있을까? 그래서 주변에서 나를 체크해 줄 필요를 느낌. ㅎㅎ

참고 : http://ssje.org/ssje/2013/04/07/what-it-means-to-have-faith-in-god-br-david-vryhof/


올해 초엔가 초등학교 6학년 큰 아들이 '트럼프처럼 저렇게 막말하는 사람이 어떻게 대통령이 되려고 할까요?'라는 질문을 했다. 그냥 맞장구 쳐 주려다 다시 곰곰이 생각해보니 저 트럼프가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40대 이상이면 트럼프에 대해 많은 이들이 잘 아테다. '부동산 재벌'. 부동산이라는 단어는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부정적이긴 하지만 하여간 경영에 대해서는 매우 탁월한 사람이다라는 게 지금까지의 인식이었다.
그런 사람이 미대선에 나온다고 하더니 매일같이 막말파문을 일으키고 그 파문이 거대한 파도가 되서 결국엔 미국 대통령까지 가게 했다.

https://youtu.be/dE2Dl6E1AIQ

오늘 퇴근길에 우연히 80년대부터 지금까지 트럼프의 주요 인터뷰 또는 연설 장면을 보게 됐다. 자기 소신이 매우 뚜렷하고 똑똑한 사람인 것은 맞다. 게다가 그 영상을 보는 내내 작년에 매우 흥미롭게 봤던 책과 오버랩 되면서 더더욱 트럼프란 인물을 너무 가볍게 본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책은 '아틀라스'

출간된 지 반세기가 지났지만 여전히 백인을 중심으로 한 미 주류사회에서 계속 읽히고 있는 책. 주요 내용은 자본주의의 이상과 같은 유토피아는 왜 현실세계로부터 배척당하는 지, 미국이 지향하는 영웅은 누구인지에 대한 책이다. 계몽소설 같기도 하지만 미국이라는 나라의 생리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 그 책의 주인공과 같은 전능함, 초인성을 겸비한 인물로 현실 버전에 해당하는 게 트럼프 아닐까 싶다. 내가 그렇게 여긴다는 게 아니고 미국의 백인을 중심으로 한 중산층(또는 중산층에서 밀려나간 하위계층 포함해서)이 그렇게 열광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트럼프가 이명박과는 달리 자기 나라의 체질개선에 대해서는 나름 개선책을 가지고 진행할테고 나름대로의 성과를 얻을 것도 같다. 대선 중에 그의 막말은 계산된 매우 치밀한 막말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하며, 영상을 보니 그런 생각이 자연스레 들게 된다. 물론 한국의 이명박처럼 국가를 수익사업의 대상으로 전락시킬 가능성도 많다. 우리는 이미 겪어 봤잖은가?

아무튼 앞으로 미국은 자기 나라의 일에 점점 더 관심을 가지게 될 테고 그만큼 외부의 일에는 손을 놓게 될 테다. 어차피 세상의 대부분의 나라와는 대서양, 태평양을 두고 멀리 떨어져 있는 만큼 지정학적으로 자국에 대해서만 신경쓰는 게 가능한 형편이니까. 경찰국가? 이런거 개나 줘버려. 이런 생각을 확고히 굳히게 될 테고, 그 만큼 내 집 주변의 담장은 더 올릴테다. 내 코가 석잔데 남의 일에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기 싫다. 이건 거.

이제 팍스 아메리카는 한동안 사라질까? 그 공백이 주는 영향은 상상하기 힘들 듯 하다. 무주공산에 여우가 왕노릇 한다는 말도 있는데, 앞으로 우리나라 주변은 시끄러워 지겠다. 지금까지는 미국이 그래도 세계정세를 주도하려고 자기 집 사정이 안좋더라도 무리를 했지만 이젠 그런거 당분간 기대하기는 힘들테니. 미군의 철수 같은 것도 상대국가를 압박하기 위한 수단이었지 정말 빼내가리라고는 여지껏 의심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젠 상황이 바뀌었다. 정말 나갈 수도 있다.... ㅎㅎ

미군이 빠지면, 물론 일본까지 빼지는 않으리라고 여기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일본에서도 발 뺄지도. 자국의 이익에 조금이라도 (-)가 되는 일에는 절대로 손대려 하지 않을 테니. 20세기 초의 일이 재현될까? 우리는 대통령 잘(?) 뽑아서 나라 기둥뿌리가 뽑히게 생겼는데, 그 기둥뿌리가 아예 뽑혀 나가게 될 지도 모르겠다. 중국의 한 성으로 편입될까? 남한은 한양성, 북한은 평양성 이렇게? 아니면 북한은 중국이 먹고 우리는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거나. '동북아는 그들이 알아서 하도록 둬!'라고 분명 천조국의 대장이 그럴테니.

힘의 공백으로 생기는 파장이 우리 삶에 어떻게 영향을 주게 될까?

트럼프가 여지껏 막말쇼를 보여줬지만 자기는 대통령이 되기 위한 연극이었을 뿐 지금과 크게 바뀌지 않으니 걱정말라고 하지는 않겠지?

제주 여행 루트 만들기(관광지만)





2014년 7월 6일 주일 낮 설교는 미리 예고된(?)대로 담임목사님이 관련 서적을 내시면서 '복'에 대해 얻은 인사이트를 나누는 자리였다.

개인적으로는 참 좋은 말씀이었다고 생각했고 예배 중에도 그랬다. 다만 들으면서도 한가지 마음 한구석에 자꾸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설교의 주제는 '복'이란 무엇이며 여기에 대한 성도의 자세는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내용이었다.
사실 최근 들어 한국교회의 기복신앙에 대한 터부시는 심각하다 못해 되려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마져도 손사래치는 이상한 형국이었다. “기복"이라는 단어 속에 하필 복이라는 blessing이 자리잡고 있다보니 왠지 복이라는 단어만 나와도 신앙의 수준이 낮은 듯한 선입견을 주게 된 것은 사실이다.

  • 복 : 히브리어 바라크(Barak) -
    1. 하나님께 무릎을 꿇는 것.
    2. 좋은 말을 하는 것.(하나님께는 찬양, 사람에게는 칭찬)

그런 상황에서 목사님의 설교는 참 시의 적절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하고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한마디로 '복'은 여지껏 많은 이들의 머릿속의 부귀영화 이런 게 아닌 '하나님' 그 자체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그것이 바로 복이다. 참 은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계속 걸리는 부분은 복에 대한 정의를 내놓으신 것에 대한 성도의 자세였다.

좀 불편하게 다가온 부분은 두번째 '좋은 말'과 관련해서였다.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게 아니라, 저 말씀을 과연 성도들이 어떻게 적용할까 하는 우려가 생겨서였다.

과연 '좋은 말'이란 무엇일까? 이 부분은 목사님이 깊게 설명해 주시지 않았다. 다만 이후 나올 책에서 다뤄지기는 하겠지만 어제의 설교중에서는 부족해 내 오해가 있을지도 모른다.

목사님의 설교대로라면 성도는 비판의 말, 정죄의 말은 절대로 해선 안된다. 물론 악의적인 의도가 있다면 당연히 그런 비판은 정말 지양해야 함은 당연하다. 말 그대로 우리 입에서는 듣기에 선한 말만 나와야 한다. 늘 '잘했어요', 'GOOD', '훌륭해요', 'WONDERFUL', '예뻐요', 'BEAUTIFUL'.

그런데 말씀 도중 목사님이 택시를 탔다가, 우연히 접한 인터넷 방송 속의 비판논조(아마도 야당성향의 인터넷 방송이었나 보다. 나꼼수 같은)를 듣고 그것을 꺼달라고 했다는 부분에서는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게 되었다. 물론 목사님 개인적으로는 충분히 그러실 수 있겠다 싶었다. 그런데 목사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많은 성도들은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게 될까? 상대를 비판하거나 거친 말이 나오게 되면 과연 그들은 복없는 사람들인가? 재수없는 사람들이라서 기피해야만 하고 거부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일까?

'좋은'이라는 말은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귀로 듣기에 좋은 말만이 좋은 말일까?

성경 속에서도 많은 선지자들의 외침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엘리야, 아모스가 눈에 띈다. 간통한 다윗을 고발한 나단 선지자도. 그리고 세례요한이 '독사의 자식들아'와 같은 일갈. 이거 이렇게 적어 놔서 그렇지, 실제 상황에서는 어떻게 들렸을까? 과연 듣기에 좋은 말인가?

그래서 음성적인 것에 더해 그 의도 또한 살펴봐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목적과 방향이 옳다면 듣기에는 좀 거북하고 민망하다더라도 그 또한 좋은 말이지 않을까 싶다. '양약이 입에 쓰다'라는 옛말도 있지 않은가?

이러한 부분이 최근 한국교회에서 수시로 보게 되는 곤란함 아닐까 싶다. 60~70년대 계몽주의의 시대와 같은 시절, 국민을 개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잘 해온(긍정적인 부분이 많았다지만) 교회와 당시부터 지금까지 현역으로 뛰시는 큰 목사님들의 활약은 익히 아는 바다. 이 분들이 특히 강조하는 부분중에 로마서 가운데의 바울사도의 설교, 권세자들에게 머리숙이라 또는 존경하라 등등

그러다보니 정부가 어떤 문제가 있던지간에 대통령은 하나님이 뽑으신 자이니 그에게 협조는 할지언정 비판이나 비난은 하지 말아라라는게 교회를 다니는 많은 이들에게 내려진 사명(?)이다. 최근에 총리파동을 통해 다들 눈으로 확인한 사실은 교회의 장로님이 교회안에서 하신 말씀은 비판이 대상이 아니고 오히려 두둔해야할 일이라는 어처구니 없는 사실을 이미 확인한 바다.

목사님의 좋은 의도와 설교에 대해 성도는 과연 얼마나 고민하며 심각하게 말씀을 받아들이는 걸까라는 생각이 요즘 많이 든다. 지도자가 실정을 하고 고의적인 문제를 계속 양산하고 있는데도 이를 하나님이 세운 이이니 절대 비판은 사절. 이게 과연 제대로 된 모양일까? 게다가 그 지도자를 하나님이 세웠다는 근거는 뭘까? 물론 성경에 근거하여 하시는 말씀인 줄은 알지만, 그것도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가운데 해석할 것이지 그걸 현대에 가져와서 그냥 문자 그대로 적용해 버리면 곤란하지 않을까?

이 부분에서 한국교회의 많은 목사님들의 외침과 이에 대한 성도들의 화답은 유치원 선생과 원생 수준의 문답으로 되풀이되고 있는 듯 하다. '빨간불에는 무조건 건너면 안되요 알겠죠~? 네~' 뭐 이런거. 바람직한 비판마저도 악한 것으로 한번에 압살시켜버리는 요즘의 모습은 정말 아스트랄하다.

하여간에 한국교회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 중에 하나는 말씀을 받는 이들의 질적 수준 향상이 아닌가 싶다. 제아무리 좋은 설교도 받는 이들이 그에 걸맞는 수준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없다고 본다. 그래서 그 선한 의도와는 다르게 일방적인 방향으로만 적용한다던지 하는 것이 요즈음의 한국교회의 위상을 한없이 추락시키는 결과가 된 게 아닌가 싶다.


홍정길 원로목사의 말이 그래서 눈이 간다. 

홍정길 목사 “속지 말라, 멋진 말과 글에”

http://www.christiantoday.co.kr/view.htm?id=256445



어제 곧 캐나다로 유학 가는 동생 내외랑 식사하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유아용 카시트에 대한 것이었는데요.

내용인 즉, 공항에 내려서 숙소든 어디든 자가 차량을 이용하여 이동 시에는 반드시 카시트를 장착한 후 아이를 탑승 시켜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방금 낯선 이국 땅에 도착한 유학생 가족이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을 겨를도 없었을 터인데도, 걸리면 벌금, 이동 중에 재차 걸리면 또 벌금이랍니다. 상황을 고려함 이런 것도 없답니다. 게다가 설령 카시트를 미리 준비해간 주도면밀한(?) 부모들도 그 카시트가 캐나다에서 인증하는 제품이 아니라면 역시 벌금. 벌금….
결국 출발 전엔 반드시 캐나다 인증 카시트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만약의 사고가 생기더라도 보험의 적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처음엔 무슨 저런 융통성 없는… 이런 생각이 들다 문득 세월호가 생각 났습니다. 그러면서 동생이 하던 말, ‘절대 캐나다에서는 세월호 사고는 일어나지 않을 거야.’

우리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공무원인 저를 대입해서 생각해봤죠. 양쪽(부모, 단속 공무원)의 입장 모두 말입니다.
아마도 부모였다면 봐 달라고 하고 안 들어주면 화내고, 억지 부리고 해서 처음이니 봐주기를 원해 넘어갔을 수도 있습니다. 한편 단속 공무원이었다면, 처음엔 벌금 받을 수도 있겠지만(거기까지 단속 했을까라는 의문도 들고), 재차 걸렸을 때는 나름 ‘유도리’라는 것을 들고 봐주고 넘어갈 지도 모릅니다. 
한국적 정서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다는 것에 동의하시는 분 많을 겁니다. 화내고 억지 부려서 금액 줄이고, ‘이후에 꼭 답니다’ 이러고 지났을 수도 있고, 공무원은 ‘다음에 꼭 다셔야 해요’라고 나름 인정을 베풀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런 일이 있었으므로 부모는 이후에 꼭 카시트를 달기는 했겠죠.

결국 카시트는 달았고, 공무원은 어느 정도 단속의 효과는 거두었으므로 결과적으로는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그렇지만 앞서 말한 ‘만약의 경우’가 문제입니다. 
‘만약의 경우’
이걸 무슨 수로 예측할 수 있겠습니까? 캐나다에서 체류하는 기간이 수년인데 방금 도착해서 몇 시간 이동하는 게 그 기간 중에 얼마나 차지하겠습니까? 그 기간에 대한 비중이 너무도 적기에 그 정도는 감수하자 이렇게 생각하는 게 일반적이지 않을까요?
그렇지만 ‘만약’이라는 것은 그런 일반적인 통계나 확률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1%의 사고 확률도 사고 그 자체로 봤을 때는 무시해서는 안되니까요. 우리는 통계 또는 확률이라는 것의 허점에 너무 쉽게 적응되어 있습니다. 비교적 낮은 쪽에 분포하는 확률값을 무시하고 지내는 것에 익숙해진 것입니다.

바로 그 부분을 캐나다 같은 나라에서는 무시하지 않고 철저히 적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런 경우를 두고 고속 성장한 한국의 상황에 빗대어 그랬느니 어쩌니 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여지껏 살면서 다수의 입장, 높은 확률 또는 통계분포의 자료에 집중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소수의 입장, 그다지 높지 않은 가능성, 주변의 자료는 거의 무시하고 말이죠. 그 정도는 감내하고, 아니면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래서는 안되는 시절이 온 것 같습니다. 꼭 이런 사건, 사고가 일어나서 만이 아니라 환경 자체가 그럴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라는 것이죠. 
물리학에서도 이론을 정립하기 위해서 기본 환경을 단순화시키는 방법으로 한 차원 아래의 변수는 가능한 무시하는 게 많습니다. 물론 그렇게 해서 세워진 이론은 많은 부분에 있어 잘 적용되어 왔습니다. 그렇지만 최근의 경황을 보면 그렇게 무시된 변수들이 누적되면서 발생하는 오차가 심각한 경우들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다시 오류를 잡고 더 정확한 계산이나 예측을 위해서는 그러한 미시적인 자료들도 고려를 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죠.

과거에는 딱 하나의 상황에 단순한 주변 상황, 그리고 하나만의 결과만을 주로 다루니 계산도 예측도 어려울 게 없었지만, 문명이 발전하면서 점점 그럴 수 없는 세상이 되어 가는 겁니다. 도로에 다니는 차가 몇 대 없었던 시절이라면 카시트가 그렇게 까지는 필요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1가구 1차량의 시대를 넘어 1인 1차량의 시대가 되어가는 시점에 사고의 확률은 그만큼 커지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확률에 대한 인식이 예전의 기준에 자리 잡고 세월의 흐름을 따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것을 정확한 인식하는 것은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에게는 말처럼 간단한 게 아닙니다. 제가 보기엔 일반인들도 이런 상황의 흐름을 어느 정도는 인지할 필요성이 있지만, 더 중요한 건 이러한 흐름을 더 정확히 바라보고 주도할 수 있는 이들을 신뢰하고 따라갈 수 있느냐가 중요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 사회는 큰 잡음 없이 순조롭게 유지되지 않을까 싶군요. 

하지만 앞서 말한 그런 벌금 체계를 우리나라에 당장 적용하면 굳이 이유를 자세히 안 봐도 그냥 ‘난리’ 납니다. 그 배경을 믿고 따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시스템을 도입한 것에 대한 신뢰, 한국인에게는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 ‘신뢰하지 못함’을 리더계층은 믿지 못하는 이들을 탓합니다. 미개해서, 무식해서라고 말이죠. 빅데이터가 언급되는 현대 문명사회에서 일반인은 그 사회가 제공하는 서비스에 별다른 코멘트를 달고 분석하고 이를 비판할 겨를이나 정보분석의 수준이 안됩니다. 그냥 따라갈 밖에요(미개하긴 하군요 -,.-;). 그나마 시민단체나 진보적 단체의 언급이 있지만 이미 사회는 정보의 흐름을 쥐고 있는 자들의 손에 넘어가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국민의 수준이 어찌 되었든지 그 핵심을 쥐고 있는 자들의 의식수준이 바로 그 나라의 수준을 가늠하는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리더십들은 여전히 일반 개개인을 탓합니다. 믿고 따라오지 못한다고 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현대문명은 시민사회를 거쳐, 대중사회로 넘어오면서 주도권을 대다수의 국민이 잡는 듯 했지만, 안타깝게도 여전히 핵심은 소수 리더계층에게 있습니다. 결국 무엇이 되었든 리더가 대다수 국민과의 신뢰관계 속에 이끌지 않는다면 결코 순탄한 항해를 할 수 없을 겁니다.

카시트를 이야기하다 이야기가 장황해졌지만, 그런 벌금 시스템을 만들 수 있는 조직과 이를 철저히 이행하는 집행자들, 그리고 그것의 근본취지를 이해하고 신뢰하는 사회구성원의 모습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니 우리도 언젠가는 저 모습으로 가겠거니 하는 막연한 기대감에 끄적입니다.


^^



요즘 세간의 화제가 된(?, 이슈의 중심이 됐지) 이 사진을 자세히 다시 함 봐 보자.





보통 저게 그냥 가방이라면… 두 손을 봐봐. 걍 오른손만으로 잡으면 돼. 굳이 왼손이 저렇게 지지할 필요가 없는거야. 그리고 가방을 뚫어져라 쳐다볼 필요도 없는거고.

그런데 저런 자세는 가방 들고 다녀 본 사람이라면 말이지, 특히 왼손의 모양을 보건데 뭔가 탄탄한 특성을 가진 무언가를 지지하고 있는 자세거든. 가방에 묵직한 책이 들어있거나 하지 않다면 저렇게 잡을 이유가 없는거지. 그런데 책을 저 가방에 들고 갔을리는 평소의 그네공주에 대한 평을 보건대 그럴리는 절대! 없고(전여옥 여사의 평을 보건대 그렇다).

그렇다면 뭘까? 그게 애들패드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암튼 저 자세를 보면서 내가 드는 생각은 한가지!

가방을 붙잡고 기도 중이신거다.


'오늘 토론도 무사히!'
(많이 본 적 있지? Taxi~~~~)


박 율리아나(천주교 세례명)
율리아나(시저의 엄마)
근혜(무궁화)
박 선덕(법명, 선덕여왕이라나? 뭐래나?)
모든게 국가로 존재하는…애잔하다. 

간혹 주변에서 "oo, 그건 어떻게 하면 잘 할 수 있는 거죠?" 또는 "OO형, 대단한데요, 나도 그렇게 해 볼 수 있을까요?" 라는 질문 또는 노하우에 대한 요청을 받곤 한다. 그럴 때 나의 반응은 대체로 두 가지 정도로 구분될 듯 하다.

  1. '어쩌구 어쩌구'라며 적극적으로 설명해준다.
  2. '음… 그냥 잘~'이라고 대충 말해준다.
이렇게 구분될 수 있는 건, 상대가 누구인가, 또는 얼마만큼 내가 가진 지식 또는 방법에 대해 자랑스러워 할만큼 잘 알고 있는 지에 따라 다르다. 

먼저 상대가 정말 내가 좋아하고 관심있는 경우에는 설령 내가 잘 모르고 있는 것이라 할 지라도 아는한 모는 것을 아니! 몰라도 주변의 정보를 쥐어 짜서라도 알려주려고 한다. 그렇지만 상대가 내 관심 영역의 밖이거나 탐탁치 않은 경우라면 대개 2번의 반응이 나가게 된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는 어쩔 수 없이 1번처럼 하기도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주변의 억지스런 분위기 때문인 경우다. ^^;
두 번째로는 정말 내가 잘 알고 있고 잘 할 수 있는 분야의 경우에 누군가 물어봐주기를 기대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스스로 먼저 상대에게 알려주려고도 한다. 뭐 두말 할 필요도 없이 이런 때는 대화의 시간이 늘어나고, 그 깊이도 상당해진다.
아무튼 2번 화법은 내가 잘 모르거나, 상대가 관심 밖의 사람이거나 사람은 싫지 않지만 귀찮아서 그럴 경우가 많다.

사실 이건 내 경우에 해당하므로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은 대화술을 쓰진 않을거다. 다만 주변에 많은 이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서 느낀 바는 나와 그리 다르지는 않더라는 거다. 개중에는 정말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면서 매번 1번의 화법을 쓰는 분들도 분명 있긴 하지만 소수의 경우일 테다. 그래서 내 경우를 성급하게 일반화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일반적인 경우에 잘 매치 될 듯 하다.
 
그런데! 요즘 이 2번. '잘~~~'화법을 정말 자주, 그리고 언론에 드러내며 쓰시는 분이 있다. ㅎㅎ 바로 프린세스 그네. 아닌가? 그네 할머니? 그렇다면 과연 그네 옹주는 어떤 부류에 속할까? 이 글을 읽으신 분이 있다면 당신이 판단할 문제이지만, 내 생각엔 옹주께선 일단 대개의 주제에 대해 잘 모르시는 것 같다. 이것에 대해선 많은 분들의 견해를 반영하고 있다. 예측 가능한 답변의 대가. ㅎㅎㅎ

그런데 거기서 더 나아가 수첩공주는 국민은 관심 밖의 영역에 있거나 귀찮아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뭐 어떤 이는 대한민국과 결혼한 성인이네 어쩌네 하지만 정말 국민을 사랑하고 관심 있는 분이라면 어찌도 그리 많은 국민과 관련되는 주제들에 대해 하나같이 '잘~~'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정말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시는 건가? 아무리 봐도 내 경우에 비춰 보건대 아니다. 절대 아니다. 박통의 장녀께서는 오로지 그 아빠와 60~70년대 만을 사랑하시는 거지 절대로! 절대로!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관심 없다. 그렇지 않다면 저렇게 답할 수는 없는 거다. 
근혜를 원하는 분들. 원하는 건 말리지 못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기억해두시길. 정말 공주는 그대들을 사랑하고 아껴주실까? ㅎㅎ


http://media.daum.net/politics/all/newsview?newsid=20121109204108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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