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썼던 글을 다시 보면서 AI 보고 다듬어 보라고 하니 훨씬 깔끔하기는 한데 뭔가 거친 맛이 좀 줄어든 느낌이긴 하다.

https://meteos.tistory.com/584

<원글>

I have faith in God.
나는 신을 믿는다.

I believe in friend.
나는 내 친구를 믿는다.

믿음, 신뢰? trust? faith? belief?

과연 믿음은 무엇일까? 아니 기독교인, 크리스챤에게 믿음은 뭘까?
지금 부적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송을 보면서 저들이 말하는 믿음은 생사화복을 중심으로 그것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하지만, 과연 예수를 구원자로 믿는 나, 또는 우리는 무엇이 믿는 것인가라는 물음을 다시 묻게 된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이지 생사화복을 잘 지켜 줄 것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
친구를 좋아하고 의지하니 믿는 것이지, 그가 나에게 베풀 것을 기대하고 믿는 것이 아니니까.

믿음이 간다 이런 말을 할 때 상대의 말과 행동이 일치할 때 사용하곤 한다.

말.

서로의 생각을 알려고 하면, 소통이 있어야 한다. 오고 가는 대화나 문장 속에서 상대의 생각을 알게 되고 나와 같은 점은 기뻐하고 다른 것이 있다면 더 깊은 대화를 통해 이해하거나 일치하거나, 아니면 그냥 인정하게 되던지.
또한 행동함으로 그 이해와 신뢰의 수준을 깊게 하는 것.
그래서 상대의 어렵거나 이해 못 할 상황에서도 기다려주고 헤아려주게 되는 것.
그 간에 쌓여가는 많은 작은 역사들, 히스토리.

그런데 지금의 신앙의 수준은 부적과 같아서 믿음의 주체인 나와 상대의 이야기가 아닌 그 결과물에만 주목하는 것이다.
만약 그 부적이 아무런 효험도 없었다면(내 생각에는 통계와 확률의 범주지만) 과연 방송에 나와 기쁨을 보여주고 무한한 신뢰를 보여줬을까?
많은 교회에서 회중기도, 새벽기도, 대표기도, 개인기도 중에 개인의 생사화복에 대한 간구로 넘쳐난다.
나와 하나님 간의 깊은 관계, 신뢰, 소통이 있다면 과연 그 초점이 저런 것에만 맞춰지게 될까?

이 글을 끄적이는 처음에는 부적과 믿음의 차이가 뭔가라고 하려했는데 쓰다보니 이 시점에 그간 성경을 멀리 하고 있던 나에게도 새로운 목적이 생긴다.
한 동안 왜 성경을 읽어야 하는가 하는 회의감이 들었었다.
주변에 보이는 성경통독, 성경백독, 성경필사 등등… 너무도 많은, 알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성경에 대한 행사들은 나같은 이들에게 되려 거부반응만 일으켜왔음을 고백한다. 성경을 백독했더니 병이 나았어요, 축복이 넘쳐요 등등. 그래서 대체 저 모습이 부적과 다를 게 뭔가라는 등등의 생각들.

물론 그 과정 속에 진정으로 하나님과의 대화의 장에 빠진 분들도 있겠다. 그래서 그런 노력과 수고를 폄하하고만 싶지는 않다. 그렇지만 마치 그것만이 목적인양 진리인양 나팔처럼 불어대는 소음이 너무 많아서 피로했다.

하지만 친구는, 신뢰하는 이는 서로 대화한다. 소통한다. 그것은 말이고 대화다.
하나님은 나에게 어떻게 소통하시는가? 성경 아니겠는가?

성경 아니라도 이 세상이 그 분의 존재를 알려주지 않는가라는 생각도 했었다. 굳이 성경 자주 안봐도 세상에 뿌려져 있는 하나님의 흔적만 봐도 은혜롭지 않은가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믿는 이가 멀리 있을 때 그를 그리워하며 그의 흔적을 통해 그를 기억하는 것도 있지만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한계가 있다. 그래서 간간히 편지도 하고 전화도 하고 여차하면 어디선가 만나서 서로의 안부를 묻기도 하는 것 아닐까? 그런데 나에게는 그 분이 남겨놓은 글들이 몇천년 동안 보존되며 여지껏 펼쳐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성경을 내 옆에 덩그러니 놓고 ‘봐라. 내 말이다. 쓸쓸해하지 말고 외로워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고 내 말이니까 늘 두고 봐, 곧 올게’라고 하시는데 이제 안 볼 수 있나?

라고 이렇게 끄적여놨는데 과연 1년 쯤 뒤에 나는 어디 즈음에 있을까? 그래서 주변에서 나를 체크해 줄 필요를 느낌. ㅎㅎ

 

<수정 한 글>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나는 내 친구도 믿는다. 그런데 이 ‘믿는다’는 말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영어로는 faith, trust, belief라고도 하지만, 과연 크리스천에게 ‘믿음’은 무엇일까?

오늘 우연히 부적에 대해 다루는 방송을 보며, 그들이 말하는 ‘믿음’은 대부분 생사화복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효험을 기대하고, 어떤 결과를 얻기 위한 믿음. 하지만 예수를 구원자로 믿는 나는, 혹은 우리는, 과연 무엇을 믿는 것일까?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성품과 약속에 대한 신뢰이지, 나의 삶이 잘 풀릴 것이라는 결과에 대한 기대가 아니다. 마치 친구를 믿는 것이 그가 나에게 무언가를 해줄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신뢰하고 좋아하기 때문인 것처럼 말이다.

흔히 “믿음이 간다”는 표현을 쓰곤 한다. 그 말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삶에서 진정성이 느껴질 때 자연스럽게 나온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화와 소통이 필요하다. 상대의 생각을 이해하고,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다름을 인정하는 과정을 통해 신뢰는 깊어진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그렇다. 진정한 믿음이란 그분과의 소통과 신뢰 속에서 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많은 신앙은 마치 부적과도 같다. 하나님과 나 사이의 대화보다, 결과물에만 집중한다. 만약 부적이 ‘효과가 없다면’ 그 믿음은 지속될 수 있을까?

오늘날 교회에서 드려지는 많은 기도들—회중기도, 새벽기도, 대표기도—를 들여다보면, 그 내용은 개인의 삶의 문제 해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도우시는 분이지만, 정말 그분과 깊은 신뢰와 교제가 있다면, 우리의 기도의 초점은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나는 한동안 성경을 멀리했다. 성경통독, 백독, 필사 등 성경 관련 행사를 보며 “이게 다 무슨 의미인가” 하는 회의감이 들었다. 병이 나았다, 축복이 넘쳤다는 간증들보다 그 과정 속에서 하나님과 진정한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치 그것이 ‘정답’인 양 떠들어대는 분위기는 나 같은 사람에게 피로감만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는 결국 ‘소통’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와 말씀하실까? 바로 성경을 통해서다. 물론 하나님의 흔적은 세상 곳곳에 있다. 그러나 그분이 우리에게 직접 남겨주신 말씀, 성경이야말로 그분의 가장 확실한 ‘편지’다.

멀리 떨어진 친구의 흔적만 보고는 오래가지 못한다. 직접 편지를 주고받고, 때로는 만나 대화해야 진정한 관계가 유지된다. 성경은 그렇게 내 곁에 놓여 있다. “이것이 내 말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고, 외로워하지 마. 나는 곧 올 거야.” 그렇게 말씀하시며, 기다리고 계시는 것이다.

이 글을 쓰다 보니, 나도 다시 성경 앞에 서고 싶다는 마음이 생긴다. 지금은 모르겠다. 하지만 1년 뒤쯤의 나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그래서 주변의 누군가가 나를 지켜봐주고, 이 여정을 같이 걸어가 주었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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