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에 이 영화에 대한 정보를 확인하지 않은 상태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매우 평이 좋은 영화라는 정도는 알았기에 볼 마음이 생긴 것.

처음에는 평화로운 자연과 행복해 보이는 평범한 가족이 보여 뭔가 힐링하는 내용인가 했다. 처음에는...

다만 쨍한 색감은 좋아보였으나 그럼에도 일부러 어둡게 조정한건 이 영화가 호러물인가라는 생각이 들 무렵.

인간을 태우기 위해 가장 효율적인 구조를 설계하는 미친놈들인데 무슨 사업 설명하듯이 이야기 한다.

이것들이 사람들인가 싶었다. 이 영화는 힐링을 위한 영화는 분명 아니다. 그렇다고 치유물도 아니고. 

저 동네는 '아우슈비츠'였다.

영화는 시종일관 저 벽 너머는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평화로운 일상의 정원과 주택에서 바라보는 관점만 제시하고. 그리고 무슨 이유인지 모를(물론 우리는 알지만) 굴뚝에서 나오는 시커먼 연기들만 보여준다. 더불어 저 멀리 어디선가 계속 들려오는 총성과 비명 같은 어떤 소음들. 영화 내내 줄곧 깔리는 배경 소음 같은 것이지만, 역시 이를 화면으로 지켜보는 우리는 무엇인지 알지만, 스크린 속의 그들은 무감각 것인지 상관하지 않고 그들의 삶을 누리며 살아간다.

소장이 평화롭게 낚시를 즐기는데 상류로부터 뭔가가 내려온다.
역시 우리는 저 뿌연 것이 무엇인지 안다. 그리고 저 소장은 화들짝 놀란다. 그리고...
그리고 지 새끼들은 걱정되는지 물놀이하는 자식들을 그 무언가로부터 피하도록 하는 눈물겨운 부정(父情).

그렇지. 모를 리 없고 다 알고 있다. 심지어 수용소장의 아내는 폴란드인 하녀에게 일 똑바로 안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벽 너머 저들처럼 재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고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한다. 아이들도 다 알고 있다. 그냥 모르는 척할 뿐이고 그냥 그게 당연한 것이고 일상인 것처럼 살아가고 있다. 관심의 영역 밖이 되어버린 것이지. 사람이 죽고 특히 그중에는 아이들 본인들과 같은 나이의 소년, 소녀, 아기들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그냥 풀장 만들어놓고 즐겁게 일광욕하며 한가로이 살아가고 있다. 소장 부인이라는 것은 심지어 소장인 남편이 전출가게 되지만 그간 그들이 꾸려놓은 주택이며 정원 등이 아쉬워 남겠다고까지 한다. 불과 몇 미터 벽 너머의 세게는 전혀 그들의 관심 밖이다.

그제야 제목이 이해가 됐다. 그리고 우리는 그 소장 역할의 또 다른 실재 인물도 안다.

아돌프 아이히만.

 

아돌프 아이히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오토 아돌프 아이히만[a](독일어: Otto Adolf Eichmann, 독일어 발음: [ˈɔtoː ˈʔaːdɔlf ˈʔaɪçman]; 1906년 3월 19일 ~ 1962년 6월 1일[b])은 독일인이자 오스트리아인으로,

ko.wikipedia.org

처음엔 이 인간인가 했더니 영화 속 인물은 다른 인간이며 배역 이름과 같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문구를 세상에 소개한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에 대해 저술한 책도 있었고, 또 그와 관련한 영화도 있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었겠다는 피상적인 이해를 넘어서 'Zone of Interest'는 그들만의 평화로운 일상의 모습을 그들의 어깨 너머로 체험 아닌 체험을 하며 대체 그 악마 같은 저들은 뭐였던가라는 물음에 답해주는 것 같다.

그런데 말이다. 저들의 이야기는 21세기 현재도 계속 되고 있으니 마음이 복잡하다. 특히 그 당시 피해 당사자였던 이스라엘 유대인들이 지금 가자 지구에서 벌이고 있는 짓들을 보자면 과연 절대악이라는 말은 사치고 우리 모두가 원래 악마가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든다. 멀리 갈 것도 없이 2025년 우리 대한민국에서도 벌어지고 있는 일들도 마찬가지다. 한 술 더 떠 태평양 건너 천조국이라 불리는 그 동네도 마찬가지. 당장 나의 삶에는 큰 영향이 없을 것 같아서 안심인가? 다음 세대인 나의 자녀들 그리고 그 이후의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마음이 조급해지기도 한다. 무엇을 해야, 아니면 어디서부터 뜯어고쳐야 제대로 된 세상이 될까? 아니 그 제대로 된 삶이라는 건 대체 뭔가라는 근원적인 질문까지도 해보지만 범인이 뭘 알 수 있나라는 자조만 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대단한 가해자였던 독일인들은 전후에 큰 시련은 겪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조상이 벌여놓은 짓들로도 벌어먹을 게 있는 게 보이는 것 같아서 참 아이러니 하다. 수용소를 보존하고 박물관으로, 그리고 그걸 유지하고 관리하면서 소득도 챙기고. 참 잘 되는 동네는 뭘 해도 잘 되는 것 같아서 말이다. 내 시각이 너무 비뚤어져만 가는 것 같아서 뒷맛이 씁슬하네...

독일인들답게 군더더기 없이 요란하지 않게 보존 관리는 참 잘한다. 그리고 일자리 창출도 하고...

 


 



 

 http://www.cine21.com/movie/info/movie_id/40395

 http://www.yes24.com/24/Goods/12762298?Acode=101



태어난 아기가 뒤바뀐 줄도 모르고 수년간 기른 부모들. 그리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그 아기들을 고의적으로 바꾼 간호사. 영화 중간 료타(케이타의 아버지)는 그 간호사를 찾아가 '당신때문에 우리 가정은 엉망진창이 됐어' 라고 한다.


재앙이다. 

단순한 병원의 실수였다하더라도 큰 일인데, 알고 보니 고의적인 일이었다니. 게다가 이젠 그 시효 기간도 경과해버려서 처벌도 안된다라... 영화를 보면서 저걸 어째 야 하나 싶었다. 법이 문제네 어쩌네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최근 읽은 필립 얀시의 '하나님 제게 왜 이러세요'라는 책이 떠올려진다.


미국에 있었던 여러 총기사고 중 가장 나이 어린 초등학생들이 희생된 샌디훅 초등학교 사건을 중심으로 대체 왜 이런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는가에 대해 하나님은 대체 그 때 무얼하고 계시는가에 대한 물음에 대한 책이다. 이 일만 아니라 사라예보, 일본 후쿠시마 등등의 많은 인재, 자연재해 가운데 벌어진 무고한 희생에 대한 근원적 물음이 이어진다.

최근에 우리에게도 세월호 사고로 많은 귀한 생명을 잃었다. 더욱이 이는 단순한 사고가 아닌 사회구조적인 문제의 총합이 사고로 터진 터라 대체 이걸 누구에게 모든 책임을 물어야 하는 가에 대해 우리나라는 혼란 가운데 있다.

필립 얀시의 책을 보면서 그런 처참한 현실 가운데 전능자는 개입하시지 않고 뒷짐만 지고 계시는 듯 하고, 범죄를 저지를 이들은 호위호식하면서 너무나도 잘 살고 있는 상황이라면 '대체 여러분은 어쩌겠는가' 라는 물음이 이어졌다. 그렇다고 그들을 하나하나 찾아가서 복수라도 하면 지금의 문제가 갑자기 원래의 행복했던 상태로 돌아가는가? 그나마 범죄자가 있으면 그렇기라도 하겠지만 자연재해는 또 어째야 하나? 대체 누구에게 그 문제의 책임을 지운단 말인가?


다시 영화로 돌아가서 료타는 이 문제에 대해 잘못을 한 병원, 범죄를 저지른 간호사, 실제 자기 자식 류세이를 기르고 있는 부모의 궁색한 모습, 지금의 자신의 모습같은 아버지 등등에게 그 책임을 지우려는 듯 하다. 똑바로 살아왔다고 여겼고 그리고 그 만큼 이루었으며 그래서 지금의 상태를 그대로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었는데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앞으로의 일도 어찌해야 할 지 앞길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 같은 상황에서 대체 어쩌라는 말인가?

논리적으로 따지면 원인들의 문제점을 해결하면 결과는 정확하거나 선한 결과가 나옴이 당연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게다가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를 어찌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제도를 개선하거나 법에 의한 처벌같은 인위적인 방법으로는 이미 헝클어져버린 삶의 문제를 바로잡아줄 어찌할 방법이 없다.

영화에서는 아이를 맞바꾼 가정이 서로의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여 알콩달콩 잘 살게 되었다 이런 결과를 말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문제를 던져준 이들을 단죄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와 아픔을 자신의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자기를 닮지 않아 실망스럽기만 했던 남의 아이를 다시 가족으로 감싸안는 것으로 끝낸다. 삶의 문제를 해결해야할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문제 그대로 삶속으로 끌여들여 녹이는 것으로.


필립 얀시도 하나님에 대해 동일하게 말한다. 샌디훅 사건의 부모들, 사라예보의 시민들, 후쿠시마의 희생자 가족들 가운데 하나님은 문제 가운데 상처받고 피 흘리는 그들 가운데서 함께 계시고 그들을 위로하고, 다독이고, 감싸안으셨다. 물론 그 하나님이 형체를 띄어 나타난 것은 아니다. 크리스챤이라 불리우는 이들을 통해서도, 또 교회의 이름으로도, 여러 모양으로 아픔 가운데서 움직이신다. 그렇다고 해서 문제가, 상처가 완전히 해결되고 아무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아픔은 그대로 기억되고 남아 있지만, 오히려 그 상처들로 인해서 서로를 다시 감싸고 안아주는 지렛대가 된다. 


여러 모양으로 고통을 겪는 이웃들이 있다. 세월호, 군폭력의 희생자... 많은 부모, 가족들이 힘들어하고 슬퍼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어떻게 그들을 대하고 있나? 아니 스케일을 좁혀서 내 아이들, 내 아내에게는 나는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가? 료타의 모습을 보면서 억지스런 웃음을 짓느라 힘들어하지 말고 힘 빼고 자연스럽게 삶을 대하라는 메시지를 봤다.


PS : 아역배우들이 너무 귀엽다. 특히 막내 야마토의 능청스러움은 내 둘째를 떠올린다. 그리고 일본의 배우들이 한국의 배우를 닮은건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계속 궁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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