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처럼 간만에 독서 후기를 써본다.물론 여러 책들을 지속적으로 읽고 있긴 하지만 읽은 뒤 소감을 쓴다는게 여간 쉬운일은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제카리아 시친의 책은 상당히 임팩트가 강한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어서 정리도 할겸 끄적인다.

제카리아 시친의 지구연대기 시리즈 중 2권은 이미 나와있고 앞으로도 책의 반응이 괜찮다면 지속 번역되서 나오기는 할 것같다. 내용은 주로 수메르 문명과 그리고 그 속에서 신화로만 터부시되왔던 문서들을 현대의 시각과 광범위한 자료조사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키고 있다. 특히 구약성경의 창세기 부분과 연관해서는 유사성과 관련성을 보여주고 있고, 이로 인해 구약의 사건들이 허구가 아니고 실제로 일어났던 역사의 기록임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물론 시친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점도 있었겠지만 이건 외견상 그렇다는 것이고 중동 고고학의 대가이자 학자로서의 객관적인 관점에서 성경과 그 시대의 역사를 명쾌하게 해석하고 있음은 정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만 그 해석이 기존의 것과 비교해서 너무나도 파격적이기 때문에 학계에서도 받아들기기 힘든 부분이 상당하다.

예컨대 인류의 기원은 진화에 의한 최종 산물이 아니라 '니비루'라 불리는 태양계 내의 제13행성의 영향이었다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가 통칭 '외계인'이라고 하는 것에 의해 진화과정 중에 있던 원인을 유전적으로 변형시켜 지능을 대폭 향상시켰고 결국 그들의 문명을 전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유없이 그런 것은 아니고 그들이 원하는 것(금이라고 한다. 이유는 책에 잘나와있다)이 지구에 존재하고 이에 대한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그랬다는 것이다. 이후에 파생된 문명은 모두 이 '니비루'에서 온 그들에 의한 것이다라고 시친은 주장한다. 특히 인류 최초의 문명이라 일컬어지는, 그것도 그냥 시작이 아니라 처음부터 초하이테크로 점철된 이해할 수 없는 문명의 탄생은 분명 외부의 개입에 의한 것이며 이는 수메르 문명의 유적발굴을 통해 얻어진 수많은 문서들을 통해 확인됐다고 말한다.

지금까지의 지구연대기 3권을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역사 기록들과 대조해보면 놀랍게도 그간에 그냥 파편처럼 흩어져서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그것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을 알게된다. 예를 들어 수십만년 전에 아프리카에 있었던 광산의 유적이라던지, 거의 동시대에 이루어진 문명의 시작, 지금도 고고학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피라미드의 존재 이유, 전 세계 신화마다 공통적으로 포함된 홍수신화와 기타 이야기들, 그리스 신화와 이집드 고대신화의 유사성과 수메르 문명의 연관성.....

아무튼 수메르 문명의 존재와 앞으로도 계속되어 얻어질 유물, 기록들은 숱하게 많은 고대역사의 잃어버린 고리들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게 될 듯하다.

특히 내가 관심있게 여겨봤던 구약과의 연관성은 기존에도 성경이 수메르의 기록을 베꼈느니 어쩌니 하는 것을 떠나서 그 자체로 사실의 기록임을 다시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시친도 밝히고 있지만 구약은 이스라엘 민족의 관점에서 그 당시의 사실들을 재구성한 것이기 때문에 오류라던지, 아류라던지의 문제와는 거리가 있는 듯 하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한 인물, 인물의 이름과 그 의미, 그리고 그 역할이 이 책을 통해 좀 더 생생하게 소개된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에 대해 기존의 유대전승에서는 우상제작자라고 소개하고 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전승일 뿐이다. 성경에서는 데라의 역할을 분명히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인데, 시친은 수메르 문명 당시 실존인물임이 확인된 아브라함의 가족을 통해서 그 가족은 수메르 왕가의 일족일 가능성을 제시한다. 그 근거는 단어에 대한 분석을 통한 것과, 아브라함이 이집트 왕에게 사라를 자신의 누이로 소개한 점 등을 들고 있다. 물론 이것뿐만 아니라 여러 정황과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확인하고 있다. 그러한 역사적 배경과 어떻게 해서 갈대아 우르를 떠나 하란으로 옮겨가게 됐는지 등을 설명한다. 또한 이후에 발생한 소돔과 고모라의 소멸, 열왕과의 전쟁 등을 역시 구체적 근거를 통해 설명한다.

글이 많이 길어져 버렸다. 제카리아 시친의 글을 읽다보면 최근 주목받고 있는 '사이언톨로지'교가 연상된다. 물론 시친의 의사여부와는 상관없이 그의 영향이 크다고 한다. 아무튼 그의 이론대로 아니 그가 문서를 통해서라고 하며 확실하다고 하는 그 내용을 모두 수용할 수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워낙 충격적이기도 하니까.

오늘 메일을 열어보니 교보문고 메일의 첫구절이 내 눈을 집중시켰습니다. 보자마자 '음 이것은 혹시 은영전?'

^^ 맞다. 바로 밑에 은하영웅전설이라고 떡 하니 사진도 있었습니다. 오랜만에 보니 무척이나 반가웠습니다. 그리고 접속(교보 북로그 리뷰글)해보니 글을 써놓은 분이나 리플을 다시는 분들이나 참 동질감을 느끼게 만들게 했습니다. 물론 리플도 달아들이고.

그런데 이분은 본편 10권과 외전 4권을 확보하지 못한 안타까운 사연의 주인공이였습니다(?)^^; 난 대학시절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15년 전쯤 모두 구해놓았으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네요. 그런데 내가 이책을 어쩌다가 접하게 됐는지는 잘 기억이 나질 않았는데.... 글 쓰다 보니 어렴풋이 떠오는게 대학교내서점에서 우연찮게 접했던 것 같습니다. 우연히 붙잡은 책 하나를 두고 그자리에 서서 한시간인가를 죽 읽어내려갔던 기억이네요. 좀처럼 이런 행동을 하지 않는 난데...

아무튼 중간고사 기간과 겹치는 시기에 이 책을 접해버렸고 본편 10권과 외전은 좀 구하기 힘들었지만 대구시내 책방을 뒤져가며 모조리 구해서 읽은 다음.... 물론 시험은 역시 꽝이었지만. 그러나 양웬리라는 인생의 스승을 접하고 난 후로 내 인생의 가치관이 바뀌었습니다. 좀 더 객관적인 시각과 주체적인 사상관을 가지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위에 글을 적으신 분과 리플다시는 분들과 같이 민주주의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고 현 시대를 비추어보는 안목을 기르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양웬리라는 가상의 인물을 이용한 다나카 요시키의 사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사진은 집에 꽂혀있는 것으로 교체해야 겠군요.흠~~)

아무튼 이 책을 구하는 분들이 꽤 많고,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을 구하지 못하는 분들이 의외로 많다는 점이 괜시리 가슴 뿌듯합니다. 여전히 우리집 서재 밑칸 한 블럭을 혼자 차지하고 있고, 그래서 가끔 아내의 질시(?)를 받긴 하지만 언젠가는 내 아이들에게 읽히고 싶은 욕심입니다. 물론 녀석들이 관심을 가져주어야겠지만.

고등학생 시절에 삼국지를 열번 가까이 읽었고 관우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었던 나였지만 은영전을 접하고 난 후로 삼국지의 매력은 반감될 정도로 은영전은 분명 매력적입니다. 단순히 글의 재미를 떠나서 현 시대를 다시 바라보게 하고 과연 나는 어떤 생각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계기를 주기도 합니다. 정치뿐만이 아니라 경제에 대한 가치관까지 더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양웬리의 아빠가 늘 입에 달면서 소중하게 여기던 그 '돈'. 자본의 흐름!

아직까지 이 희대의 작품을 접해보지 못한 분들이 계시다면 꼭 구해서 읽어보실 것을 권합니다. 물론 구하기가 매우 만만치 않을겁니다. 하긴 요즘엔 해적판 이북도 있긴 합니다만 종이를 넘겨가며 읽는 은영전의 제맛을 느끼기엔 부족합니다. 또 애니메이션도 나와있지만 역시 원작의 느낌에는 약간.

아! 그러고보니 게임으로도 나와있었죠. 제일 재밌게 했던 것은 은영전 3과 4편이었던 것 같군요. 작년말엔가 최신작이 나온 것으로도 알고있지만 그 때의 느낌에는 따라오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은영전 3


은영전 4



가장 최신작인 은영전 6


다시 시간을 내서 읽고 싶은 책중에 하나인 은영전. 지금까지 이 책도 열번 이상 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또 봐도 새롭습니다.(성경을 이렇게 봐야하는데. 그러고 보니 책 중에 지구교도가 기독교인을 빗댄 거 잘 아시죠. 그러면서도 저는 하나님 잘 믿고 지냅니다^^)



우주의 구조
카테고리 과학
지은이 브라이언 그린 (승산,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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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9월부턴가 읽기 시작한 브라이언 그린이 쓴 "우주의 구조"

아 힘들었습니다. 이전에 읽었던 "엘레건트 유니버스"도 꽤 오랜기간에 걸쳐 읽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좀 쉽게 넘어가나 했는데...-_-;;

그래도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존의 시야를 넓히고 뒤집는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전작의 범위를 넘어서는 장대한 스케일을 보여주더군요. 이제는 시간과 공간이라고 하지않고 "시공간"이라는 용어를 쓰도록 노력해야겠군요.^^;

이 책을 읽는 동안 주욱 크리스챤의 입장과 아닌 입장을 왔다갔다 하면서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과연 우리가 지금껏 듣고, 보고, 알아온 성경적 지식과 이에 반해 새롭게 드러나고 있는 우주의 구조는 과연 상충하는 것인가 아니면 원래부터 그래왔듯이 서로 같은 입장인가라는 점 이었습니다. 물론 브라이언 그린이 기독교인도 아닌데다 그 자신이 엣지재단(Edge Foundation, 리처드 도킨스가 유명하죠) 소속이므로 분명 눈에 보이는 것에 충실한 과학자입니다. 그래서 성경속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존재에 대해 코웃음 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책을 읽어가면서 느낀 바로는, 저자 뿐만 아니라 세계의 많은 학자들도 그들의 우주에 대한 지식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이해할 수 없는 우주에 대한 경외심에 가득차게 된다는 것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것만으로 그들에게 '그렇기 때문에 신은 존재합니다'라고 신앙을 권유한다면 더더욱 비웃음의 대상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책의 본문 중에 우주의 연혁, 특히 시간의 방향성에 대한 내용이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과연 우주는 한번 시작한 것인가? 아니면 그 이전의 어떤 우주의 소멸로부터 시작되었는가에 대한 이론을 언급한 것이지요. 그런면서 저자는 우주는 '스스로' 계속 존재해왔지 않는가라는 물음도 던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중에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는 하나님의 기록이 있습니다. 물론 단어의 일치에 국한해서 '어 여기에 동일한 내용이 있네. 거봐 이미 하나님이 맞잖아~'라고 우기진 않겠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이러한 성경상의 말씀으로 인해 현재의 우주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것은 맞지만, 그렇더라도 하나님은 창조때부터 계신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그 이전을 알 수 없는 시기부터 존재하고 계셨음을 알리고 계십니다. 이러한 언급은 지금으로부터 약 4000년 전 모세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불교나 힌두교에서도 이러한 우주의 기원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 무한히 윤회하는 불교의 사상이나 힌두의 사상. 그것이 포함하고 있는 내용은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바라보고 있는 점은 동일할 것 같습니다.

뭐 책 한권 읽고 모든 것을 논한다는 것이 우습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어차피 주께서 만들어 놓으신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고,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제 입장에서는 과학의 최첨단에서 매일 쏟아져 나오는 여러 이론들이 오히려 하나님이 베풀어 놓은 우주속에 있는 감춰졌던 비밀들을 찾아가는 과정으로밖에는 여겨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지금뿐만 아니라 과거 갈릴레이, 코페르니쿠스, 뉴튼의 입장도 마찬가지 아니었을까요? 한명 더 넣어본다면(이것은 매우 신중하게 판단해야할 부분이지만) 다윈? - ㅎㅎ 만약에 제가 소속된 교회나 기타 여러군데 몸담고 있는 공동체에서 말한다면 오히려 이단처럼 취급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무튼 브라이언 그린처럼 최첨단 천체물리이론을 수식하나 전혀 쓰지 않고 적절한 비유와 예시를 통해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대단한 능력입니다. 물론 성장과정을 보면서 입이 떡 벌어질 수 밖에 없는 천재더군요. 아무튼 엘레건트 유니버스 - 평행우주 - 우주의 구조로 이어지는 천체물리부분 책들은 어렵지만 미래에 펼쳐질 놀라운 발견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합니다. 조만간 읽으려고 사둔 리사랜들의 '숨겨진 우주'도 기대가 됩니다.

과연 제가 이 세상을 뜨기 전에 통일이론 또는 끈이론이 법칙으로 드러날 수 있을까요? 아니면 그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이론의 등장이라던지. 하나님이 펼쳐놓은 우주는 너무도 넓기에 지금까지 우리가 알아온 지식의 규모는 너무도 작다라는 것을 다시금 알게한 책입니다.

PS : 시간여행은 그 실현여부의 어려움을 떠나 가능합니다. 다만 먼저 시간여행이 가능하기 위한 웜홀이 만들어진 시점을 기준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전부터 알고 있던 내용인데 이번에서야 그 이유가 정확히 이해되는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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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일생에 대한 책을 읽기는 참으로 오랜만이다.
어렸을 적 수도 없이 읽었던 위인전기들... 그들의 태어난 때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있었던 드라마틱한 과정은 그들의 삶을 동경하게 만들고 그들중 얼마는 미래의 나의 모습을 그려보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면 그런 책들 대부분은 승리한 자(그게 전쟁이던, 누군과와의 경쟁이던, 아니면 무언가의 추구에서 결과를 얻어가는 것이던간에)에 대한 기록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 미래에 대한 기대는 성공, 승리의 삶만이 중요하게 여겨지게 됐던 것 같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때였던가 '롬멜'이라는 이름을 알게 됐다.

참 기묘한 경험이었다. 지금까지 2차대전하면 패튼, 아이젠하워, 몽고메리, 맥아더 정도의 이름만 알던, 그것도 승전국의 장군들에 대한 승전기에만 익숙하던 나에게 패전국의 장수가 그렇게 강렬하게 다가오다니.
'사막의 여우'
롬멜하면 항상 따라오는 수식어.
여지껏 이러한 이미지로만 알고 있었고 마지막에 권총자살했다는 등의 소문정도.
취미생활로 밀리터리 디오라마, 건담 모델링을 하다보니 2차대전의 독일군에 대한 어느 정도 지식이 있다고 생각해왔지만 정작 그 주역에 있었던 롬멜은 그리 잘 알고 있지는 못하다.
마침 서점을 기웃거리다가 롬메에 대한 책을 발견하고 온라인으로 구입^^

잘 알려진 것처럼 롬멜은 2차대전중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활약이 유명하다.
측면우회술과 같은 매우 전략적인 자신만의 전술로 전장을 주도하는 맹장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전략을 효율적으로 펼치고자 하여도 그는 제국군의 장군일 뿐, 그의 카리스마 넘치는 활약상 이면에는 늘 발목을 잡는 그의 정적들로 인해 북아프리카 전선이후의 그의 모습은 전장을 주도하는 면은 점차 퇴색된다.
노르망디 상륙에 대한 방어 준비과정에서도 그는 군인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동분서주하지만 역시 그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무능한 아군들.
평범한 장교로 평생을 보낼뻔한 그를 일약 스타장군으로 밀어주는 원동력이 된 총통에 대한 절대적 믿음은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점점 회의와 번민으로 이어지게 된다.
결국 총통 암살모의에 대한 주도혐의 등으로 자의반 타의반으로 죽음을 맞이...

기존에 알아왔던 승리하는 롬멜보다는 승리와 실패 그리고 좌절을 경험하는,
단순한 군인의 삶에서 나라와 민족, 사랑하는 이들을 생각하며 고뇌하고 결국 정치적 결단을 내려야하는 인간의 모습을 본다.
사실 이 책을 접하기 전에 롬멜의 전략과 전술에 대한 전문적인 것을 기대했지만, 정작 롬멜을 명장의 반열에 올려놓게 한 결정적 원인은 그 이상의 것이다라고 저자는 말하는 듯하다.

쉰들러 리스트를 기억하는가?
세상이 아무리 극단적으로 치닫고 있더라도 그 시대를 개선하려는 자들은 있다.
롬멜 또한 그러한 면이 오늘날 새롭게 조명되는 것 아닐까?
절대적 신뢰의 대상이던 총통의 명령에 고뇌하다 결국 후퇴라는 결단을 내리고, 나치 친위대의 만행에 대항하며, 포로 및 점령지의 주민을 공정하고 대우하도록 하고, 그가 있었던 곳에서 롬멜이라는 이름은 단순한 적의 장군 또는 유능한 상관의 이미지를 넘어 신뢰할 만한, 존경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오르지만 어디까지나 적, 아니면 전후의 이들에게나 그런 것이다.

길지 않은 인생이지만 조직안에서, 아니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런 경우를 자주 접한다. 분명 이건 바른 길이 아니며, 당연히 막아야만 하지만 많은 구실거리를 만들며 피해간다.
롬멜이라고 다르겠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절반을 승리로 장식해왔던 것을 과감히 버리고(?), 아니 인간이라면 누구가 느꼈을 자연스러운 감정을 따라 가는 그의 인생의 마지막을 향해가는 모습은 '남자는 등으로 말한다'라는 문구를 생각나게 한다. 응(?).. ^^

물론 반론의 여지도 많다. 왜 하필 독일제국군인가라는 점에서.
어쩌겠나?
우리처럼 늘 일본에 대해서 이야길 할 때면 입에 거품물고 외치는 것과 다르지 않을까?
최근 상영했던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보고 좋게 말한 한국인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고 충분히 예상가능한 것처럼 롬멜은 그가 있었던 자리를 원망해야 할 지도 모른다... 정말 그럴지도. ㅎㅎ
 " 어머니 왜 저를 독일에 태어나게 하셨나요? " 이럴까?

만약 그가 미국에서 태어났다면 패튼과 쌍벽을 이룰만한 사람이 되었을까?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누가 말했으므로 이런 쓸데 없는 상상은 별로...
롬멜 상세보기
마우리체 필립 레미 지음 | 생각의나무 펴냄
총 통의 명령을 어기고 수십만 부하의 목숨을 구한 '위대한 퇴각'을 감행한 총사령관 롬멜. 그는 증오해야 마땅할 나치였나, 아니면 히틀러에 저항한 영웅이었나? 이 책은 지략과 전쟁술 등 기존의 책들에서 다루어진 내용들 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롬멜의 내적 변화에 주목하고 그에 관한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다. 롬멜이 직접 쓴 일기를 비롯해 개인적인 편지들, 그리고 명령 기록들과 메모 등의 원전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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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


늘 꿈을 꾸며 그것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가는 이의 이야기

이제 몇십쪽만 더 읽으면 다 읽긴 하는데

왠지 지금 글을 쓰지 않으면 안되겠다라는 느낌이 오길래 흠....


연금술사 영어로 alchemist

납을 금으로 만드려고 했던 고대의 장인들?

납을 금으로 만드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상태의 변화가 아닌 화학적으로 그 성질 자체가 변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그 옛날 배웠던 기억이 난다.

극단적으로 비유한다면 남자가 여자로 바뀌는 정도의 변화라고나 할까?

역사적으로 이를 실현한 연금술사는 단언컨데 아무도 없다.

어찌보면 연금술사는 실패의 대명사일지도.


그렇지만 연금술사들이 이뤄놓은 결과들이 누적되고 또 누적되다가

오늘날의 급격한 문명의 발달을 일으켰다는 사실을 보면 참 아이러니하다.


      실패 + 실패 + 실패 + 실패 ......... = 대성공?


하하~~ 물론 이런 공식은 아니겠지만 끊임없는 열정과 행위의 반복이 소망하는 것을 이루게하도록

주변의 모든 것들을 바꿔가는 듯 하긴 하다.

연금술사가 그토록 소망하던 납에서 금으로 바꾸는, 경천동지할 만한 일들이

오늘날에는 여건만 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 되어버렸으니까.


주인공 산티아고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유년시절 나의 꿈을 생각하게 한다.

크~ 팔로마산 천문대의 소장이 my dream

코스모스라는 책에 완전히 필이 꽂혀서 칼세이건처럼 되려는것이 이유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느 길로 와 있지?

돌이켜보면 산티아고에게 나타난 "표지"와 같은 것이 분명 수도 없이 지나갔던 것 같긴 한데.... 흠

고딩시절 늘 희망학과는 천문학과, 그래서 대학전공은 당연히 천문학을 선택했었지만, 익숙함을 좇으려 한 것이 문제였나?

맞다! 산티아고처럼 떠났어야 했다.

나는 나의 꿈을 위해서 무엇을 했을까? 첫발을 디딘 후에 그냥 머물러 버린 결과가 오늘인건가?


지금은 그 "표지"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인생을 잘 못 산거라고 할 수 있을까?

아직은 알 수 없다. 크리스탈 상점주인처럼 무언가 새로운 것을 깨닫게 될 지도 모르지... ^^

연금술사 상세보기
파울로 코엘료 지음 | 문학동네 펴냄
1987년 출간이후 전세계 120여 개국에서 변역되어 2,000만 부가 넘는 판매량을 기록한 책. 신부가 되기 위해 라틴어, 스페인어, 신학을 공부한 산티아고는 어느날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양치기가 되어 길을 떠난다. 집시여인, 늙은 왕, 도둑, 화학자, 낙타몰이꾼, 아름다운 연인 파티마, 절대적인 사막의 침묵과 죽음의 위협 그리고 마침내 연금술사를 만나 자신의 보물을 찾게 되는데.....

테메레르!

간만에 타오르게 만드는 책을 손에 잡았다.

역시 책은 술술 넘기는 맛이 최고다.

기존 역사에 상상력을 더한 전쟁판타지~~~

이제 1권 보고 있지만 앞으로 볼 3권에 예약판까지 ^^ GOGO

피터잭슨이 영화화를 추진하고 있다하니 더욱 기대만빵

리뷰는 다 읽고 난 다음

ps : 어스시전집(일명 게드전기)보다 넘기는 속도가 빠르다. 아무리 유명한 시리즈라도 개개인마다 선호도차이가 나기 마련인가보다

테메레르 2 : 군주의 자리 상세보기
나오미 노빅 지음 | 노블마인 펴냄
나폴레옹 전쟁이 절정이었던 시대, 격렬한 용들의 공중전이 시작된다!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이던 19세기 초, 용과 비행사로 구성된 각국의 공군들이 전쟁에 참전하면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다룬 판타지 장편소설. '나폴레옹 시대에 용과 비행사로 구성된 공군이 있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가설을 바탕으로 한 이 소설은 1805년 1월 영국 해군 소속의 렐리언트 호가 부화 직전의 용알을 싣고 가던 프랑스 소형구축함을 전투
테메레르 1 : 왕의 용 상세보기
나오미 노빅 지음 | 노블마인 펴냄
나폴레옹 전쟁이 절정이었던 시대, 격렬한 용들의 공중전이 시작된다!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이던 19세기 초, 용과 비행사로 구성된 각국의 공군들이 전쟁에 참전하면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다룬 판타지 장편소설. '나폴레옹 시대에 용과 비행사로 구성된 공군이 있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가설을 바탕으로 한 이 소설은 1805년 1월 영국 해군 소속의 렐리언트 호가 부화 직전의 용알을 싣고 가던 프랑스 소형구축함을 전투

이 책 읽는 것을 굉장히 망설여했었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류의 책을 기피하기 때문이다.

마치 '넌 할 수 있어'라는 최면을 걸고 모든 것을 무조건 희망적으로만 바라보게끔 하는 마약같은 느낌이 있어서다.

요즘에 이런 류의 책이 너무나도 많다. 가장 최근에는 'SECRET'같은 책이 대표적일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보게 된 것은 아무래도 나의 종교적 성향때문인 것 같다

레이크우드 교회는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미국의 대형교회다.

평소에 미국의 기독교 흐름에 관심이 많은 나에게 있어 그런 흐름의 선두에 있다고 하는 조엘 오스틴 목사가 쓴 책이니 계속 신경이 쓰이긴 했다.

그래서 큰 맘 먹고 읽었다.(다 읽는 데만 석달 걸렸다. 왜이리 뭉그적거리게 되는지 ^^;)


예상과 그리 다르지는 않다.

그나마 일반인들이 외치는 '네 안에 있는 거대한 용을 깨워라'식의 구호는 아니고, 내가 믿는 하나님안에서 믿음을 키우라는, 그래서 늘 긍정적일 수 있다라는 부분에서는 충분히 공감할 수는 있다.

다만 조엘 목사가 미국 내에서도, 또한 한국 기독교 내에서도 '설탕신학'이라는 비평을 하는 것처럼, 특히 옥한흠 목사님의 지적처럼 복음에 대한 방향설정이 좀 위험하다 싶기도 한 면이 있긴하다.

복음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피흘림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의미하는 구원에 대한 메시지임에도, 조엘 목사는 그런 부분보다는 단지 귀에만 즐거운 듯한, 물론 실생활에서 이러한 삶의 자세가 영향을 끼치는 것은 분명하지만 진정한 복음의 메시지 전파는 미흡한 듯 하다. 조엘 목사가 정규 신학과정을 거치지 않았다라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기존의 마인드컨트롤과 같은 주제를 다루는 책과는 분명 거리는 있다. 삶의 모든 부분에서 긍정적일 수 있는 것은 나의 의지가 차지하는 비중보다는 하나님의 역할이 크다라는 것과 그 분에게 전적으로 의뢰할 수 있는 긍정적 사고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는 점에서.

신학분야뿐만 아니라 일반 서적에서도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있어 기대할 만한 책이었다.

그러나 좀 더 복음적인 측면을 건드렸더라면 하는 바람과 또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서 일반대중에게 좀 더 다가갈 수 있었다라는, 요즘 교회가 겪는 딜레마를 우회하는 듯한 책일 듯.

긍정의 힘 상세보기
조엘 오스틴 지음 | 두란노 펴냄
믿는 대로 된다는 '긍정의 힘'을 강조하는 조엘 오스틴 목사의 『긍정의 힘』. 미국 차세대 리더로 급부상하고 있는 저자의 저서로, 최선의 삶을 위한 7단계를 안내하고 있다. 단계별로 실질적인 제안과 조언을 제공하며, 오늘을 온전히 살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준다. 이 책이 말하는 마음의 힘은 '하나님 안에서 품는 긍정의 힘'이다. 저자가 안내하는 7단계를 거침으로써 평범함을 넘어 잠재력을 끝까지 발휘할 뿐 아니

베르나르가 쓴 책은 그날 읽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

개미를 읽었을 때도 그랬고(그땐 길을 걸으면서도 읽었다), 타나토노트, 개미혁명 때도 역시 그랬다.

파피용도 어제 하루동안 틈틈이 읽어, 자정을 약간 넘겨서야 다 읽었다. 덕분에 피곤하다.

베르나르는 상대방이 글을 읽지않고는 못배기게 하는 재주가 있나보다.

다만 이번 파피용은 전작들만큼의 기발함은 보이지 않는다는 아쉬움이 있다.

여러가지 이야기를 짜집기한 듯한 느낌.

- 무한한 탈출이라는 소재는 최근에 본 애니메이션인 '천원돌파 그렌라간'이 떠오르고

- 거주지 우주선인 파피용의 형태는 건담의 콜로니(물론 콜로니에 대한 개념은 50~60년대 나사에서 이미 만든것이긴 하지만)

- 폐쇄된 공간안에서의 인간군상들의 한계적 모습은 '하느님 끌기'에서 본 타락한 인간의 모습

- 새로운 지구로의 여행은 '배틀스타 갈락티카'

- 인류의 조상은 머나먼 우주에 있던 인류의 전파? 이건 제카리아 시친의 '틸문'시리즈

물론 베르나르가 이것을 보고 베끼진 않았겠지만 그간 존재해 온 여러 미디어의 소재를 그냥 짜집기 하듯 묶어놓았다는 것은 반론의 여지는 없을 듯 하다. 온라인서점의 서평 대부분이 공감하는 듯한 분위기다.

하지만 어쩌면 베르나르는 이러한 짜집기를 통해 그간 보여주었던 기발함과 신선함보다는 다른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한 것 같기도 하다.

인간내면에 대한 깊은 성찰, 또는 피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적인 한계를 드러내고자 하는 느낌을 받았다.

선별하고 선별해서 태웠더니 얼마간은 잘 지내는 것 같더니만 어느 순간을 지나면서부터는 그야말로 혼란, 카오스의 세계로 들어가 버리는 인간들. 이래서야 많은 이들의 질시와 반대 가운데 탈출한 의미가 없쟎은가?

또 기껏 미지의 행성에 도착하고도 그들의 모습은 천여년 전, 아니 수백만년전 인류가 걸어온 것과 다른 바 없다.

지금도 우리들은 인류의 미래에 대해 말하라고 하면 다분히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이야기를 하려하고, 또한 인류애적인 관점으로 이 세상을 선하게 이끌어야 한다라는 말들을 하지만 인간의 한계를 적나라하게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말이라는 것이다.

이타적이다 이기적이다라는 말은 분명 둘 이상의 존재가 있어야만 한다. 이 세상에 혼자 있으면서 '난 이타적이야, 이기적이야'라고 할 수는 없을테니까. 그렇다면 이기적인것이 먼저일까 이타적인 것이 먼저일까?

존재는 무존재라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존재한다는 것은 무존재에 대한 반발, 반작용인가? 없으려고 하는 자연적 본성에서 있고자 하는 의지, 이건 이기적인 것인가?(일상에서 쓰는 이기적인 것 이상의 의미로서 말이다)

책에서는 마지막을 새로운 희망을 주려는 듯 마치고 있지만,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이기적인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만으로는 절대로 바뀔 수 없는 숙명을 보여주고 있는 듯 하다.


내가 철학을 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리 깊은 생각을 하는 사람도 아니기에, 이런 깊은 주제에 대해서는 빈약한 답 밖에 못하겠다. 게다가 이러한 주제는 이미 수많은 학자, 이야기꾼들이 다뤄왔던 거라 그리 신선하지도 않고... ^___^;

다만 이 모든 것에 대한 구원은 절대자의 손길외에는 없다라는 믿음이 더 확고해 지기에 써본다. 인간은 스스로는 안된다. 외부의 개입만이 유일한 구원이다.


파피용 상세보기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 열린책들 펴냄
<개미>, <뇌>, <천사들의 제국>의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작 장편소설. 태양 에너지로 움직이는 거대한 우주 범선 '파피용'을 타고 1천 년간의 우주여행에 나선 14만 4천 명의 마지막 지구인들. 인간에 의해 황폐해진 지구를 떠나 새로운 희망의 별을 찾아 나서는 모험담을 흥미진진하게 그려내고 있다. 발명가 이브, 억만장자 맥 나마라, 생태학자이자 심리학자인 바이스, 항해 전문가 말로리 등 각계각

제목처럼 저는 소위 예수쟁이 또는 안티들이 말하는 개독교의 신자입니다.

큰 교회 찬양팀에서 베이스기타를 맡고 있고, 전에는 중고등부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한 교사이기도 하구요.
어려서부터 부모의 신앙을 물려받았고, 지금도 믿음의 동역자들과 신앙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요즘은 참 혼란스러운 세상입니다.
믿음과 대치되는 일들이 너무나도 많죠. 그냥 혹 하고 넘어가지 쉬운 세상입니다.
다빈치코드, 예수의 무덤 다큐 등등 많은 미디어에서 이러한 것을 담고 흘려보내고 있지요.
그래서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는 '다빈치코드와는 비슷한 아니면 대치되는 내용을 담고 있나'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이 책을 읽고자 하는 기독교인에게 미리 말씀드리자면 이 책은 믿음에 기름을 부을 수도 물을 부을 수도 있는 양날의 검을 가진 내용이다라는 겁니다.
저의 경우는 전자에 해당합니다만 책의 내용이 상당히 위험수준을 넘나들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깊은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신다면 충분히 수용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여겨지네요.

이 책의 주제인 '성경이 주후로 수많은 변개가 이루어졌다!' 기존 신자나 비신자에게도 충격 또는 당혹스런 내용일 겁니다.
변개 또는 왜곡이라는 부분. 안티에게는 공격의 소재요 신자에게는 신앙을 흔들리게 할 만한 내용이지요.
축자영감설, 성경무오류설을 교리로 하는 기독교에 있어 이 문제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일 겁니다.

이 책을 읽기 직전에 '하루만에 읽는 기독교역사'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지금까지 세계사에만 관심이 있었지 정작 기독교의 역사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던 저에게는 짧기는 하지만 흐름을 파악하는 데 있어 유익했습니다.
그 후에 이책을 읽다보니 성경 변개는 어찌보면 필연일 수 밖에 없다라고 이해되더군요.
예를 들어 성경무오류설, 축자영감설은 로마카톨릭 이후 여러 공의회를 통해 결정된 것이므로 인간의 주관이 관여했다라고 할 수 있지요.
따라서 이러한 결정을 무조건 따르기에는 무리가 있다라는 것이지요.
물론 저는 하나님의 말씀은 오류가 없다라고 믿습니다.
다만 그것을 받아 적는 또는 그것을 담는 인간에게 문제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무튼 변개가 됐건 왜곡이 됐건 아니건, 복음서를 가장 먼저 쓴 게 마가이건 아니건 간에, 또한 마가의 관점과 누가의 관점이 다르다는 거 등등 이 모든 것은 최초의 사건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내용이 전개된 것이지 않겠습니까?
예수가 실재했고 그의 이적, 가르침, 수난, 죽으심, 부활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과연 마가가 그러한 글을 남길 수 있었겠는가 라는 것입니다(저자도 이 부분을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누가, 마태, 요한의 경우도 마찬가지구요.
마가의 원작을 부분적으로 첨삭, 변개(후에 필사자들의 변개 포함)했다고는 하지만 원사건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러한 복음서를 쓸 수나 있었겠습니까?
사도 바울, 집사 스데반 등등 또한 마찬가지지요.
이들은 예수님과 동시대에 살면서 실제의 사건을 목도 또는 체험한 인물들이므로 책의 서술, 변개와는 별도로 원 사건의 실재는 틀림없다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러한 관점에서 이 책을 보았으면 합니다.
사람이 만들어 놓은 교리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변개나 왜곡에 대한 이 책의 설명은 충분히 수용할 수 있을 겁니다.
이러한 것은 결국 신의 영역이 사람의 영역으로 넘어오면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오류이니까요.
따라서 문자적인 성경이 완벽하다 아니다의 측면보다는 이 책의 이면에 담겨져 있는(어쩌면 저자도 바라고 있을듯한) 하나님의 실재와 예수의 생애, 가르침, 죽으심과 부활이 과연 진실이구나라는 믿음의 눈을 키워가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나라는 저의 생각입니다.

성경 왜곡의 역사 상세보기
바트 어만 지음 | 청림출판 펴냄
성경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과 우리가 알지 못했던 성경 왜곡과 오기의 역사를 검토하는 책. 고대 사회의 필사 관행들, 필사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었던 오기의 예들, 오기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이유들, 오기의 결과로 생겨난 다양한 이문들, 후대에 삽입된 본문들 등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고 있다. 또한 흩어져 있는 사본들을 찾아 원본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을 소개하면서, 그 사람들이 가장 이른 시기의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작가 : 제임스 모로
줄거리 : 암초로 인해 배가 난파되고 이후 기름띠 유출사고의 책임으로 실직 중인 발라파이소호의 선장 앤서니 반호른은 어느날 천사장 가브리엘의 방문으로 하느님의 죽음에 대해 알게되고 그 시신을 북극 00 지점에서 매장해 달라는 부탁을 받게 된다. 그후 발생하는 해프닝(꽉 막힌 이성주의자, 신을 잃은 자들의 광란, 바티칸의 음모, 전쟁광들의 정신나간 놀이 등...)에 대한 이야기

<감상평>
하나님의 죽음 ≒ 신의 부재 인가?

현대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믿는 신앙인과 신은 없거나 아주 많다라고 믿는 이들로 구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부류에도 하나님을 자신의 목적과 수단으로 대체해버린 이들도 있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때묻지 않은, 신실한, 정말로 세속적이지 않은 신앙인 vs. 그외의 사람들로 최종구분할 수도 있으려나.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신을 신실하게 믿으며 살아가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 둘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점이 있을까? 삶의 질이라던지 여러가지로 달라질까?

하나님의 존재가 사라질 때를 가정한 소설이지만 주변에서도 확인해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문명이 시작할 즈음에도도 책에서 묘사된 것과 유사한 광란의 시기도 있었을 거다. 물론 문명시대 또한 그러한 경우는 많다. 2차대전의 유태인학살, 중세의 마녀사냥 같은거.
그렇지만 이러한 시기나 역사적 사실들은 지속적이진 않다. 중간 중간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곤 한다.
왜 그럴까?

분명 신은 죽었다, 존재하지도 않았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즐비함에도 세상은 이런 사람들과 함께 지금까지 잘 지내왔다.  정말 신이  없는 것처럼 믿도록.
비록 중간중간 인류멸망까지는 아니어도 세상이 곧 망할 것만 같았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은 선이 악을 이긴 것처럼 보인다.
마치 신의 개입이 없이도 우리는 잘 살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처럼.

과연 칸트의 정언명령과 같은 도덕률이 사람들로 하여금 광란의 시기에 제정신을 차리도록 한 것일까?
정말 이러한 도덕률(예를 들어 공자의 사상, 부처의 가르침, 기타 여러종교 및 사상가의 주장)에 의해서 세상은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더욱 더 바람직한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일까?

그렇지만 여기서 한가지 집고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이 과연 우리가 도덕, 또는 선으로 여기는 것들은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인가? 이것은 선이고 저것은 악이며 당신은 선을 택해야 된다라고 누가 정한 것인가? 사회적 약속? 종을 지속하기 위한 자연적 선택?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선택을 하게끔 한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이것들은 오랜 세월을 통해 현재의 내가 존재토록 하게한 것이다.

현대의 과학은 어떠한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을 인지한 누군가가 있다는 것이고 이러한 관계를 나열하다 보면 궁극적인 누군가, 또는 초월자가 있어야만 이 세상이 존재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는 이도 꽤 있다.

이러한 면에서 기독교와 타종교간에는 극복할 수 없는 극명한 차이점이 존재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점이 그것이다.
모든 종교는 사랑을 강조한다. 기독교 또한 그러하다.
그렇지만 세상을 회의적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완전히 방향을 달리한다.
세 상에는 희망이 없다는 것! 매우 독선적으로 보이지 않는가? 이러한 점이 기독교로 하여금 전도와 선교에 주력하게끔 한다. 사랑하는 내 가족, 친척, 친구, 모른지만 아름다워 보이는 저 존재들, 등등... 세상에 희망이 없으므로 그들을 희망으로 인도하려는 사랑의 힘!
이게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터무니 없다라고 한다는 것, 인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가치관은 지구에 사는, 중력에 혼이 잡혀있는(ㅎㅎ 건담의 대사 중에 있다) 우리들만의 가치관일뿐 세상을 창조한 이에게는 전혀 가치없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아 무튼 이 책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나 부존재에 대한 증명을 목적으로 한 책은 아니다.(이면에는 그런 것철럼 적은 것 같긴 하지만) 책의 마지막은 결국 사람에게는 신이 존재하던 하지 않던간에 희망이 있음을 보여주려고 한 듯하다. 비록 사람사는 세상이라 이런저런 부류의 생각과 행동들로 있어 매우 소란스럽긴 해도.
하느님 끌기 상세보기
제임스 모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하 느님은 히죽 웃고 계셨다.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채로…. 대형 유조선 기름 유출 사고 때문에 선장직을 그만둔 반 호른. 그의 앞에 대천사 라파엘이 나타난다. 그는 하느님이 어느 날 이유 없이 죽어서 그 시체가 바다 위에 떨어졌다며, 시체가 부패하기 전에 북극으로 인양할 것을 요구한다. 이제 3,200미터에 이르는 그 거대한 시신을 끌고 가는 황당한 프로젝트가 시작된다. 그리고 이 시신을 둘러싸고 교황청, 무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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