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have faith in God.
나는 신을 믿는다.

I believe in friend.
나는 내 친구를 믿는다.

믿음, 신뢰? trust? faith? belief?

과연 믿음은 무엇일까? 아니 기독교인, 크리스챤에게 믿음은 뭘까?
지금 부적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송을 보면서 저들이 말하는 믿음은 생사화복을 중심으로 그것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하지만, 과연 예수를 구원자로 믿는 나, 또는 우리는 무엇이 믿는 것인가라는 물음을 다시 묻게 된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이지 생사화복을 잘 지켜 줄 것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
친구를 좋아하고 의지하니 믿는 것이지, 그가 나에게 베풀 것을 기대하고 믿는 것이 아니니까.

믿음이 간다 이런 말을 할 때 상대의 말과 행동이 일치할 때 사용하곤 한다.

말.

서로의 생각을 알려고 하면, 소통이 있어야 한다. 오고 가는 대화나 문장 속에서 상대의 생각을 알게 되고 나와 같은 점은 기뻐하고 다른 것이 있다면 더 깊은 대화를 통해 이해하거나 일치하거나, 아니면 그냥 인정하게 되던지.
또한 행동함으로 그 이해와 신뢰의 수준을 깊게 하는 것.
그래서 상대의 어렵거나 이해 못 할 상황에서도 기다려주고 헤아려주게 되는 것.
그 간에 쌓여가는 많은 작은 역사들, 히스토리.

그런데 지금의 신앙의 수준은 부적과 같아서 믿음의 주체인 나와 상대의 이야기가 아닌 그 결과물에만 주목하는 것이다.
만약 그 부적이 아무런 효험도 없었다면(내 생각에는 통계와 확률의 범주지만) 과연 방송에 나와 기쁨을 보여주고 무한한 신뢰를 보여줬을까?
많은 교회에서 회중기도, 새벽기도, 대표기도, 개인기도 중에 개인의 생사화복에 대한 간구로 넘쳐난다.
나와 하나님 간의 깊은 관계, 신뢰, 소통이 있다면 과연 그 초점이 저런 것에만 맞춰지게 될까?

이 글을 끄적이는 처음에는 부적과 믿음의 차이가 뭔가라고 하려했는데 쓰다보니 이 시점에 그간 성경을 멀리 하고 있던 나에게도 새로운 목적이 생긴다.
한 동안 왜 성경을 읽어야 하는가 하는 회의감이 들었었다.
주변에 보이는 성경통독, 성경백독, 성경필사 등등… 너무도 많은, 알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성경에 대한 행사들은 나같은 이들에게 되려 거부반응만 일으켜왔음을 고백한다. 성경을 백독했더니 병이 나았어요, 축복이 넘쳐요 등등. 그래서 대체 저 모습이 부적과 다를 게 뭔가라는 등등의 생각들.

물론 그 과정 속에 진정으로 하나님과의 대화의 장에 빠진 분들도 있겠다. 그래서 그런 노력과 수고를 폄하하고만 싶지는 않다. 그렇지만 마치 그것만이 목적인양 진리인양 나팔처럼 불어대는 소음이 너무 많아서 피로했다.

하지만 친구는, 신뢰하는 이는 서로 대화한다. 소통한다. 그것은 말이고 대화다.
하나님은 나에게 어떻게 소통하시는가? 성경 아니겠는가?

성경 아니라도 이 세상이 그 분의 존재를 알려주지 않는가라는 생각도 했었다. 굳이 성경 자주 안봐도 세상에 뿌려져 있는 하나님의 흔적만 봐도 은혜롭지 않은가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믿는 이가 멀리 있을 때 그를 그리워하며 그의 흔적을 통해 그를 기억하는 것도 있지만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한계가 있다. 그래서 간간히 편지도 하고 전화도 하고 여차하면 어디선가 만나서 서로의 안부를 묻기도 하는 것 아닐까? 그런데 나에게는 그 분이 남겨놓은 글들이 몇천년 동안 보존되며 여지껏 펼쳐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성경을 내 옆에 덩그러니 놓고 ‘봐라. 내 말이다. 쓸쓸해하지 말고 외로워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고 내 말이니까 늘 두고 봐, 곧 올게’라고 하시는데 이제 안 볼 수 있나?

라고 이렇게 끄적여놨는데 과연 1년 쯤 뒤에 나는 어디 즈음에 있을까? 그래서 주변에서 나를 체크해 줄 필요를 느낌. ㅎㅎ

참고 : http://ssje.org/ssje/2013/04/07/what-it-means-to-have-faith-in-god-br-david-vryhof/



인쇄술이 보편화되기 전까지 사람들의 신앙은 생활 속에서 겪는 많은 일들을 통해 내면의 독백과 되새김을 거쳐 자라나고 이것을 공동체와의 나눔을 통해 성장했다. 하루하루의 삶속에 지쳐있는 사람들에게 신앙의 세계에 접촉할 수 있는 기회는 일주일에 딱 한 번의 예배였을 것이다. 그나마도 설교자 옆에서 또렷이 말씀을 들어보는 것은 감히 꿈에도 꿔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많은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믿음의 길을 걸었고 현대인들이 바라는 그런 성스러운 삶을 살았다. 요즘처럼 수많은 설교자의 주옥같은 말씀, 깊은 신앙의 세계로 안내할 책들을 전혀 접할 수 없었음에도 현대인에게 귀감과 도전이 되는 그들의 신앙은 어떻게 자라난 것일까?

믿음은 들음에서 나는 것이다라는 성경말씀처럼 들음에 있어서는 요즘과 비할 바 없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시기에 과연 어디서 들음을 얻을 수 있던 것일까?

반면 정보화시대 속 현대인은 평생 들어도 남아도는 수많은 설교와 신앙서적 속에 있다. 매 주일도 모자라 수요일, 금요일, 심지어 매일의 새벽예배. 주일 또한 한번의 예배가 아닌 시간대별로 쪼개 여러 예배가 있어 거의 매시간마다 주께 드리는 예배가 열리고 있다.

이러한 풍요함 가운데서 신자들의 믿음은 들음의 기회가 늘어남에 따라 같이 성장했을까? 이러한 의문을 가지는 것이 회의적인 것으로 여겨지겠지만 그럼에도 그 차이는 무엇인가 궁금해진다.

최근에 읽은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책에서 17세기 이후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에 힘입어 증가한 인쇄물이 인류에게 끼치는 영향을 보면 삶은 풍요로워지는 반면 점점 정신세계는 이전보다 되려 후퇴한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보여준다.

그래서 요즘 많은 사상가들은 인류 역사상 모든 면에서 가장 풍족한 이 시기가 인류가 퇴보하는 분기점이 아닌가라는 역설적인 평도 한다.

신앙의 세계도 마찬가지여서 말씀은 넘쳐나고 아멘의 소리는 전세계의 교회마다 커져만 가지만 정작 본질은 없고 껍데기만 남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현실화되는 것 같다. 우리나라만 봐도 불과 십수년전까지만 해도 교회는 사회를 받쳐주는 든든한 반석같았지만 지금은 기둥은 낡고 낡아 뭔가로 대체되어야 할 것 같은 위기 상황에 있다. 우리만의 문제는 아닌 것은 앞서 말한 내면은 텅 비어가는 인류의 현재 상황과 맞물려 전 세계적인 현상인 듯도 하다.

나의 생각은 없고 정리되지 않고, 쌓여있지도 않고, 되새김할 것이 없어 결국 말씀은 넘쳐나나 속에서 수용하지 못해 그냥 배설되어 버리는 것이다. 대체 이러한 상황은 어떻게 개선될 수 있을까? 생각없는 사람들을 다시 생각하는 존재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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