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의 일에 대해 지금도 똑같이 분노하거나 그냥 과거의 기억으로 추억하는 경우가 있다. 같은 사건인데도 말이다.

왜 그럴까?

아마도 그러한 일이 있은 후의 과정일 것 같다.

두가지 A와 B라는 과정이 있다고 해보자. A라는 과정에서 한 사건에 대한 수많은 정보와 상호관련성을 통해 이해를 하고 결국 포용이 이루어져, 이후로는 그 사건을 아무렇지 않게 보게 되는, 혹은 너그러이 보게 되는 것이다. 반면 다른 B의 과정은 위의 프로세스가 이뤄지지 않아 여전히 미해결인 상태이다. 결국 중간과정의 변화, 또는 존재유무에 따라 미래의 대응방식이 결정된다.

뭐 당연하게 들리는 이야기지만 이걸 보면서 뇌의 의사결정구조가 참 궁금해진다. 위의 과정이 뇌의 어느부분에서 일어나는지는 전공자가 아니라 자세히는 모르지만 micro적 관점에서 보면 일련의 화학작용(전기작용 포함한)에 의해 위의 의사결정이 이루어진다. 마치 1 세개가 있었고 이를 무리지어서 전개하다 보니 (1+1)+1로 묶고 2+1로 전개되서 마침내 3이 되는 것처럼. 이해되지! 그런데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의 놀라움이 있다. 일개의 사건, 이후에 전개되는 많은 프로세스에 의한 사건에 대한 이해. 여기까지는 수학적인 전개도 가능할 듯 하다. 그런데 이해된다고 해서 그것이 포용되고 관용으로 무조건 가는 것은 아닐 것 같다. 관용과 포용도 어떠한 과정이 있을 것 같은데. 수학적으로, 어떠한 메카니즘으로 표현이 가능할까? 논리적 비약을 할 수 밖에 없지만 아마도 여기에는 영적인 부분이 작용하는 것 아닐까? 즉 하나님이 인간에게 불어넣은 것이 작용하는 것이리라고 추측한다.

예를 들어 기르는 개에게 벌주고 난 후 이유를 설명한다한들 그 개가 관용과 포용이라는 덕목을 알 수 있는가? 그들에게는 다음부턴 하지 말 것이라는 이해, 즉 오로지 본능에 충실한 과정만이 존재할 뿐! O와 X의 나열에 의한 결과물에 대한 복종 또는 순종만이 존재한다. 따라서 이주인을 이해하고 포용하자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세상 인간을 제외한 어느 생명체에게서 관용과 포용이라는 덕목이 나타난다는 이야기를 접해본 적 없다.

만약에 과학이 이러한 인격적 또는 영적인 부분을 완전히 설명할 수 있는 날이 올까라는 생각에는 결코 그럴 수 없다라고 본다. 물론 시시비비를 따지는 당위와 부당위에 대한 행위적인 측면은 설명가능하다고 본다. 또한 윤리에 대해 어느정도는 설명도 가능할 것이다. 위의 개의 경우처럼 말이다.

분명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남겨놓은 부분이 존재한다. 영적인 부분! 성경에도 오로지 인간에게만 생령을 불어넣으셨다고 말씀한다. 관용과 포용 등등 이런 것은 영적인 존재인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다.

PS : 뇌에 대한 연구가 계속 진행중이다. 영국이 이 분야에서 독보적이라고 하던가. 과연 어떠한 수준까지 진행됐을까? 내 생각이 나만 해본 것이라고는 여기지 않는다. 분명 이 부분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 -_-

=================================================================


한참 전에 생각난 것을 끄적여 놓은 글을 옮겨놓고 보니 당췌 뭔 소리인지 다시 생각 좀 해봐야 겠다. ^^;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