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패드 프로 11인치(2세대, 프로로는 4세대) 간단 리뷰

많은 리뷰들이 있어 내 관심사로만 이야기하자면 usb-c에 대한 것. 라이다니 A12Z니, 매직키보드니 이런 건 관심 없다. 어찌 보면 usb-c에 대한 리뷰는 3세대 때 이미 나왔을 이야기였겠지만 나는 이제 쓰게 됐으니.

 

애플 iOS의 폐쇄적 환경이야 두 말 할 필요도 없지만 여태껏 그런 환경에서도 돌파구를 찾아보고자 이 장비 저 장비 기웃거려봤으나 마땅한 해결책은 없었다. 외부로부터의 자료 입력은 클라우드 또는 무선환경을 통해서나 그나마 가능했는데 미리 클라우드에 올려놓고 있다면 의외로 간단하지만 정작 현장에서 바로 자료를 넘겨받아 작업하려고 하면 여의치 않은 경우가 많다. 특히 용량이 큰 경우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런 점에서 usb-c를 통한 확장성 확보는 정말 신의 한 수다 싶다. 여태껏 애플만의 전용 규격만을 이용하다 보니 포기한 게 한 두 개가 아닌데 말이다.

예를 들어 usb-c 허브를 통해 pd전원과 hdmi, ext hdd or sdd 를 연결하는데 전혀 무리가 없다. 덤으로 블루투스로 키보드와 마우스, 그리고 무선 헤드폰까지 한 큐에 모든 게 해결된다. 그냥 된다. 사무실에 맥북을 위해 설치한 환경을 아이패드가 그냥 쓸 수 있다. 맥에 연결하던 usb-c 케이블을 그냥 아이패드에 꼽으면 된다. 맥용 전원 + hdmi + 외장하드 + usb speaker가 그냥 된다.

 

잡스는 아이패드를 포스트 PC의 자리에 놓기를 원했다. 그리고 애플의 요리사(Cook)는 멀고 먼 길을 돌아 거의 십여년 만에 그런 위치 언저리에 아이패드를 끌고 온 것 같다. 과연 잡스라면 진작에 usb-c를 채택하지 않았을까도 싶다. 아이맥에서 usb를 과감히 도입했던 것처럼 말이다. 마진의 쿡이 라이트닝 포트에 대한 집착 또는 재고떨이를 위해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한참 걸렸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제서야 외부환경과 하드웨어의 소통이 원활해지기는 했지만 소프트웨어가 페이스를 같이 못하고 있다. 좀 처지는 느낌이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녹음한 멀티트랙 음원을 개러지밴드에서 작업하려고 하면 맥에서는 멀티트랙 음원들이(16채널) 포함된 폴더를 통째로 던져주면(drag&drop) 되는데 iOS 개러지밴드에서는 채널 하나하나를 일일이 넘겨줘야 한다. 터치 환경에 최적화되지 않아 불편한 점인데 점점 개선되지 않겠나 싶다. 다시 말 하지만 여기까지 해 준 것만 해도 어딘가! ㅎㅎ 

(파일 하나 하나 선택해서 하나하나 트랙에 던져줘야 한다.)

 

참고로 개러지밴드에서 음원 import 하는 방법

1. 개러지밴드에서 내 파일 만들고

2. 오디오입력으로 트랙 만들고

3. 마디 설정을 자동으로 놓고

4. loop - 파일 - 파일 앱에서 찾기로 원하는 음원 선택

5. 리스트에서 불러온 음원을 끌어다 트랙으로 던져 넣기

6. 이 과정을 트랙별로 해야 한다. 

 

많은 리뷰에서 아이패드의 포지션에 대해 ‘아직... ‘어쩌고 하는데 개인적 견해로선 이미 지나서 딴 데로 가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부족한 점이 있긴 하지만?', 그건 기존 pc환경에 익숙해서 느끼는 거다. 그냥 아이패드의 환경 안에서 바라보면 아이패드 1세대(2010)부터 써왔던 진성 애플빠로서는 초창기 버전과 지금의 아이패드는 마차에서 바로 전기차로 넘어가는 엄청난 차이를 보여준다. 만약 70~80년대 IBM이 아닌 애플이 주류였다면 아이패드의 시대는 훨씬 빨리 왔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러다 보니 맥과 아이패드의 위치가 애매해졌다. 처음에는 세 들어왔던 처지에서 이제는 집주인 행세를 하려 들지도 모른다는. 

p.742(서양문명을 읽는 코드, 신)

"오늘날에도 신의 유일성을 왜곡해서 이교도에 대한 배척과 분쟁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그때 역시 신앙을 자신들의 세속적 탐욕에 이용하는 불순한 세력(성직자, 정치가 ,상인)이 선동해서 저지른 반그리스도적이고 반신앙적인 만행이었지요. 우리는 여기서 “최선의 것의 부패는 최악이다(Corruptio optimi pessima)”라는 오랜 격언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십자군을 일으키며 “신의 뜻이시다(Deus Le Volt)”라는 구호로 민중을 선동했던 중세 성직자들이 그랬듯이, 신을 왜곡하여 빌미로 삼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가장 쉬운 선동 방법이지만 가장 나쁜 방법이기도 하지요."

중세에만 존재하는 십자군이 아니다.
현 시대에도 존재했던 아니 지금도 존재하는 십알단이 있고 신천지가 있다.

성직자 -교회 총회, 전광훈 같은..
정치가 - 음... 요즘 핑ㅋ당?
상인 - 순실전자

이런 커넥션은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 퍼져 있을테다.

https://m.clien.net/service/board/lecture/14707167?od=T31&po=0&category=&groupCd=allreview

매번 클리앙의 글만 퍼오기는 하지만 이 시대를 사는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생각해봐야 할 주제라고 여기는지라.

핵심은 종교는 현세대의 기준으로는 비합리적인게 맞고 그걸 인정할 수 있어야하는데 많은 교인들은 비합리적(사실의 문제)=BAD(선악의문제) 이런 범주의 오류에 빠져 있다는 것. 그래서 이걸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

어릴 때 교회를 통해 회개와 구원에 대한 믿음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칼 세이건의 'COSMOS'를 다섯번 이상 탐독하면서 신앙과 과학에 대한 견해를 나름 가지고 있었던 터라 종종 교회 안에서 창조과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그냥 듣고 있자면 논쟁거리로 갈 것 같아 그냥 입다물고 있는 경우도 있고 어떨 때는 이단아처럼 대해질 때도 있지만 어쩌겠나?

생각이란게, 내 믿음이란 게 뇌 속의 사고과정, 그것도 양자수준의 세계에서 임의로 결정되다보니(될 것이라고 요즘의 뇌과학에서는 설명하는 것 같다) 어린 그 시절 머릿속의 어떤 결정으로 인해 여지껏 이르렀는데 그걸 어떻게 바꾸나? 이걸 설명하고자 하면 꽤나 긴 글이나 시간이 필요할테니 생략하고.

아무튼 그나마 나름대로는 신의 존재에 대해 의심이 없는 것 하나로 여지껏 버티고 있는 것이다만 요즘의 교회 꼬락서니 보고 있자면 회의도 많이 들지만 바울사도를 통한 성경 말씀에 희망을 가지고 살아야지. 희망이 있고 건전한 교회도 많다.



Bowers & Wilkins PX에서 PX7으로 넘어와 며칠째 쓴 소감.

숫자와 사이즈만 변한게 아니라 소리를 다루는 게 B&W 원래 능력을 비로소 보여준다는 느낌.

전작에서는 노캔 On Off의 성향이 너무 달랐는데 이제는 큰 변화없이 자연스럽게 들려준다. 마치 애플 에어팟프로의 그 기능처럼. 물론 헤드폰과 이어폰을 같은 범주에 넣고 비교할 수는 없지만.

자회사 800 시리즈 스피커의 소리를 기준으로 설계했다는데 그런 초고가 스피커는 직접 들어본 적이 없어 모르지만 적어도 로이코 전시장 가서 직접 그런류 스피커 소리를 들어본 바로는 이 헤드폰은 B&W가 헤드폰에 손 댄 이후로 지금에 와서는 제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싶다.

블루투스, 무선 헤드폰으로 이정도 소리를 들려준다는 건 너무 고마운 것. ㅎㅎ 게다가 노이즈캔슬링을 켰는데도 말이다.

덧붙여 착용감도 전작 PX는 착용하고 20~30분 정도 지나면서부터 정수리를 압박하는데 이번에는 매우 편안하다.

아무튼 소리와 외관 디자인 두개 모두 매우 신경쓰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PX를 의아하게도 조기에 단종시킨 것 같고.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전작의 노캔 시 소리가 껐을 때와 너무 다른 점은 사용 내내 제작사의 능력을 의심케 했으니까.

마지막으로 케이블을 연결하면서 노캔을 쓸 수 있는데 생각지도 못한 장점을 얻게 됐다. 사실 PX때부터이긴 하지만 베이스 실연주 시, 특히 합주 시에 모니터용으로 최고다. 외부 소음이나 배음이 섞이지 않아 타악기와 내 악기가 매우 선명히 귀에 들어온다. 예전에 대학로 이어폰샵 가서 이에 대해 이야기해봤더니 딴 세상 이야기처럼 대하기는 하더라만. 일단 써보면 다른 모니터 헤드폰 못쓰게하는 단점도 ㅎㅎ

그나저나 예배가 다시 열려야 연주 때 테스트 해 볼텐데. 언제쯤이 될까? 😢 @ 노원 우리집


사소한 정의 - 10점
앤 레키 지음, 신해경 옮김/아작



이 책을 알게된 것은 #페미니즘 이 반영된 SF 소설이라는 주간지 서평을 통해서다. 요즘 우리 사회의 화두 중 하나인 페미니즘이다 보니 SF와 결합한 페미는 어떤 느낌인가 싶어 골라봤다. 그래서 이 책의 모든 등장인물은 He가 아닌 She, 그녀들이다. 심지어 인공지능과 같은 가상인격도.


물론 그들, 또는 He 들도 있기는 한 것 같지만 여하튼 POV는 그녀들의 시선을 통해서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녀의 불평등에서 비롯한 문제를 부각 시키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관점만 바뀐 거다. 이게 처음엔 꽤 어색하긴 하다. 대체 언제쯤 '그'가 나오나 기다려질 정도 였다. 물론 그런 일은 없다.


앞서 페미니즘을 이야기했고 그런 평이 있지만 정작 소설의 주제는 그와는 관련이 거의 없는 듯 하다. 배경설명이 전무해서 그런 지도 모르겠다-예를 들어 왜 여성성(性)이 주된 성(sex)이 됐는가 등에 대한 것들 말이다.
여하튼 보는 이마다 각각 이겠지만 '나'라는 것을 정의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이런 주제는 사실 많은 SF작품을 통해 제기된 흔한 이야기이도 하다. 그렇지만 이 책처럼 수량적으로 시간적으로 스케일을 크게 잡은 경우는 흔하지 않다. 
그리고 ‘#사소한_정의’, 원제는 ‘Ancillary Justice’인 정의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사소한’이라는 단어와 ‘부가적’이라는 뜻을 포함하는 ancillary라는 단어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아무튼 소설 속에서 더불어 순간순간의 상황 속 사소한 듯한 정의에 대한 결정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떤 결과를 만들 지, 그것이 과연 거대한(?) 정의(Justice)를 이루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 가를 이야기한다. 카오스 이론의 영향을 따른 듯 한데 이 또한 흔한 소재이긴 하다. 
그런데 이 두 소재를 그녀의 관점으로 부드러우면서도 가볍지 않게 잘 버무려놨다.


이전에 존 스칼지의 ’노인의 전쟁’이라는 책과 그 시리즈를 읽었다. 역시 스페이스 오페라로 구분되는 유사한 장르의 책이다. 거기서도 작가 앤 레키와 같이 복제인간을 통해 ‘나’를 정의하는 것이 미래세계에서는 지금과는 현저히 달라질 것을 예고하고 있다. 다만 페미니즘의 영향인지는 몰라도 스컬지와 레키의 작품의 차이점이 나타나는데 노인의 ‘전쟁’이라는 제목처럼 유혈이 낭자한 묘사가 많고 전투장면들이 박진감 있게 묘사된다면 ‘사소한 정의’는 그 보다는 훨씬 차분하고 정적인 편이다. 그래서 1백여 페이지가 넘어가기 까지는 매우 지루한 감도 있어서 읽는데 매우 주의를 요한다. 물론 후반부 클라이막스에 이르러서는 호흡이 가빠지게 하는 장면들이 등장하지만 역시나 매우 절제된 듯한 느낌이다.


간만에 좋은 작품을 만났다. 주제도 좋고 우주를 배경으로 해서 스케일도 만족스러운 책이다. 시리즈라는데 다음 작품도 봐야겠음.


+ Recent posts